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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 시인 / 무거운 말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
봄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온다 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에서
신미나 시인 / 화부산(花浮山) 벚꽃
손톱만한 아가들이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내놓고 손을 잡고 발을 구르며 춤춘다
깨끗한 맨발에 흙이 묻지 않으니 저들은 귀여운 귀신인지도 몰라
그 무슨 배꼽같이 우스운 이야기가 있어서 방울꽃을 흔드는 은총이 있어서
흰 돌 위에서 걀걀걀 웃다가 상추 싹 위에 올라타 삐쪽빼쪽 울 듯한데
올라가는 발자국은 찍혔는데 내려오는 발자국은 지워진 길 여자가 유모차를 끌고 밝은 산을 오른다
신미나 시인 / 꼬리 나는 다시 태어났지 물음표로, 느낌표로 나는 도살하는 손으로 식탁의 풍요를 위해 기도하는 자 나는 신의 젖꼭지를 빨면서 꿀과 은총을 더 달라고 기도하는 자 나는 가축의 살을 굽고 튀기면서 혀로 기름진 입술을 핥는 자 꼬리가 다시 생겼지 기다란 선으로 채찍으로, 물음으로 꼬리는 묻는다 아름답니? 나팔꽃 넝쿨이 다른 식물의 줄기를 휘감고 올라가 꽃 피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니? 생선의 가시와 뼈를 구분해 부르는 게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 세계가 꼬리는 신의 머리부터 등뼈까지 살점을 들어내고 싶어 하지 죄다 발라내고 싶어 하지 어떤 영혼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사랑받는 척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홀로 작은 돌을 만지작거린다 어떤 이는 행렬의 맨 마지막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식판을 내밀며 기쁨을 근근이 배급 받는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가 반짝이는데도
나는 다시 태어났지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친구를 잃기 위해
약한 새끼를 버리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노래를 듣기 위해 노을이 아름답다고 쓰지 않기 위해 -『현대시』 2022 9월호 중에서
신미나 시인 / 지하철역에서 십오 분 거리
마당이 있는 저 집에서 살면 참 좋겠다 언덕 위에는 여자대학교가 있고 배구공 튕기는 소리가 가끔 들리고 비빔국수 잘하는 냉면집도 있고 가을이면 키 큰 은행나무가 긍지처럼 타오르는 동네 문방구 평상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핀잔 주지 않는 할머니가 있고 옆에서 신문지 깔고 고구마 순 껍질이나 같이 벗기고 싶고 해 지기 전에 수건을 걷어 오른팔에 얹고 옥상에서 내려갈 때 젖이 불은 개가 헐떡이며 걸어가는 것을 보는 집 보러 왔다가 그냥 간다 이가 썩어 구멍 난 데를 혀로 쓸며 돌아보는 사직동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에서
신미나 시인 / 파과(破瓜)1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목사님이 말했는데
손가락이 하나 없는 언니의 머리는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헌금함이 돌아오면 우리는 현금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콧등을 내려다봤을 뿐인데 너희는 착하구나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구나
해바라기가 해를 원망하며 비를 기다릴 때
고사리처럼 몸을 비틀며 지렁이가 죽어갔다
신미나 시인 /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거울
할머니는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몸을 접어 영정 사진으로 들어갔다
내가 제사상에 올렸던 대추 씨를 혀로 굴리고 있을 때
할머니는 슬픔이 고단해서 자기의 두 발을 오려버렸다
할머니가 신던 버선을 만지작거리면 신기롭게도 주름이 하나씩 펴지고 피가 젊어져서는
강보에 싸여 이가 하나도 없이 웃는다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기처럼 웃는다
다시는 이런 놀이를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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