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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자 시인 / 바닥거울
가스불에 얹어둔 스테인리스 냄비 머릿속 새떼 쫒는 사이 새카맣게 탔다
누가 바닥 검은 거울을 놓아둔 것이냐 나락으로 떨어졌던 한 때가 바닥에서 여과 없이 잔인하게 보였다
손 안에 철 수세미 움켜쥐고 젖 먹던 힘 다해 박박 문지른다
꽁꽁 언 바닥에 주저 앉아있던 만다라가 밀어 올려 차오르는 달에는 오래된 계수나무가 칡넝쿨의 손을 잡았다
꿈틀거리는 이른 봄의 부력에 꿇었던 무릎 일으켜 세우는가
삭풍 지나간 바닥 끝자락에서 어둡던 연못은 서서히 맑아지고 있다
심수자 시인 / 편두통, 기우뚱한
한 사람이 세 사람이 되고, 네 사람이 되는 동안 꽃들은 침묵에 들었다
오후 세 시가 새겨진 커튼 속 괘종시계가 울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해도 달팽이 걸음은 멈춘 듯 멈추지 않는다
오독의 시간이면 어때 우기에 끌려다녔으면 어때
사람과 사람 사이 내리는 안개비에 시계의 톱니바퀴는 녹슬고 녹슬어 저절로 삐걱거리고
침묵의 꽃봉오리들 깨어나 기웃거리면 세시의 유리창을 가로막은 커튼의 무게는 점차 가벼워지겠지
마침내 네 사람이 한 사람이 되고 피었던 꽃들 저절로 고개 숙였다 해도 탁자에 놓인 책의 낱장, 저절로야 넘겨지겠는가
시계 반대편 벽에 걸린 그림 속 여자의 표정은 나를 닮아 여전히 기우뚱이어서 더는 끈적이는 슬픔, 만지지 말기로 한 나
앓고 있는 편두통 속에서 화가 모딜리아니를 꺼내주고 싶다
심수자 시인 / 수국사에서
수국빛이 가장 고요해질 무렵에 나, 수국사 간다
강제 징용된 수백 명의 조선인들 바닷길은 열리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대웅전 한쪽에 모셔진 위폐들
매년 번갈아 위령제 지내는 경주 수국사, 이끼 섬 천덕사 천정 연등 속에는 아직도 젖은 눈빛들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돌아오지 못한 혼이 실린 듯 연화봉 산까치 떼는 절 뜰, 산사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한참을 우짖고 날아오른다
진혼의 날갯짓인 양 피고지는 수국 현해탄 물결무늬 꽃잎들 무릎 꿇은 비로자나불 앞에서 뚝뚝 멍 자국 미소로 번지고 있다
-『감응의 구간 』(형상시학10집 )
심수자 시인 / 일시 정지 버튼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다가 밑 빠진 독에 사랑을 쏟아 붓다가 순간들을 문득, 멈춰 세우고 싶어졌다
탑처럼 쌓인 신용카드 결제 금액 청구서를 바라보다가 몰려오는 편두통에 머리를 흔들다가 이 전에는 본 적 없는 디오라마를 헤맨다
거울을 깨고 거울 속으로 달아나고 싶어졌다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도 않았으므로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 담장그늘 아래 검은 고양이로 앉아본다
혀로 윤기 도는 털을 가다듬어 보다가 순금만으로 그린 고려불교탱화 속으로 살그머니 손 들이밀어 보다가 절대 인간이 그린 게 아니라고 빡빡 우긴다
나도 모르게, 순간에서 순간으로 옮겨가는 나에게도 일지 정지 버튼을 달아주고 싶다
심수자 시인 / 저녁의 분식
섬과 섬 사이에 생겨난 연육교 길게 펴 얹은 다리 상판을 뚝뚝 떼어내어 수제비로 끓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들이 찰지다
길이 멀어 가보지 못한 섬들을 반죽해 끓는 물에 하나하나 던져 넣는다면 무슨 맛이 날까
냄비뚜껑 활짝 열어 오르는 김 속에 아팠던 날들 흔적 없이 증발시킬 수 있다면 남은 생, 쫄깃쫄깃 씹어 볼 수도 있을 텐데
땅속에 묻어 두었던 달항아리에서 붉은 물 뚝뚝 흐르는 김치라도 한포기 꺼내어 방금 끓여낸 수제비와 곁들인다면 가보지 못한 까마득한 길마저도 쭉쭉 찢어 먹을 수 있을 거야
잉여의 눈물로 팔팔 우려낸 국물은 깊은 맛일 것 그제서야 내 콧노래에 맞춰 허밍 허밍 저녁의 섬들은 저절로 터져 둥둥 떠오를 거야
ㅡ 『모던포엠』 (2022, 4월호)
심수자 시인 / 두타산 적송
아름드리 저 소나무뜯어먹은 구름으로 몸 안 나이테 붉게 새겼을까
지워져가는 산짐승들 발자국까지도몸에 새겨 넣으면서 몇 백 년 면벽의 자세로 눈빛 허공에 닿았다
속세의 번뇌 버리고 천은사 부처 찾아 가겠다고 바랑 걸머지고 두타산 고갯마루 넘어 가던 옛 사람들 눈빛도 박혀있을 것
나무의 껍질은 구피목,아직도 걸어가야 할오늘의 내 등산화 발자국은 어떤 문양으로 기억될지
지워지기도 하고,남겨지기도 하는 눈길 끝에서 안쪽의 살갗은 사리처럼 붉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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