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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이명耳鳴
너 어디서 우는 것이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운다.
백지를 앞에 놓고 단정히 무릎 꿇어 참회하는 밤,
제대로 한번 외쳐보지 못한, 제대로 한번 통곡해보지도 못한 이 한 생을 내 시여, 너는 용서해선 안 된다.
계절은 이미 기울었는데 온 세상 하얗게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하는데 이제라도 광야에 나가 한껏 외쳐야 한다는 것이냐. 밀실에서 실컷 통곡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냐.
오세영 시인 /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다
날리는 꽃잎들은 어디로 갈까, 꽃의 무덤은 아마도 하늘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꽃잎처럼 붉게 물드는 노을.
떨어지는 별빛들은 어디로 갈까, 별의 무덤은 아마도 바다에 있을 것이다. 해질 무렵 별빛 반짝이는 파도,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뒤바뀌는 것 지상의 꽃잎은 하늘로 하늘의 별은 지상으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우리 이제부터는 멀리 있는 것들을 그리워하자. 우리는 시방 너무나 너무나, 가까이 있다.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에서
오세영 시인 / 총은 한방이다
요즘 어느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면서* 실탄을 허비해 진퇴양난이라고 한다. 그러니 또 다른 어느 작은 나라에 무릎을 꿇고** 제발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 어찌 이상타 하랴. 미상불 당할 패배는 일단 피해놓고 보는 것이 상책. 그러게 애초부터 총질은 왜 했을까. 같이 잘 지내든지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든지……
그러니 실탄, 포탄, 미사일, 원자탄 다 소용이 없다. 옛 하르빈의 우리 안중근 열사를 보아라. 총은 한 방이다. 한 방이 이 세상을 바꾼다.
죽은 TV화면을 벌떡 일으켜 한 세상 환하게 밝히는 리모컨의 그 총질 한방.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적인 침공 **2023년 북한에서 러시아의 요청으로 탄환 원조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오세영 시인 / 가을 빗소리
한편의 교향 향악인가? 불어서 두드려서, 튕겨서 혹은 비벼서 음흡을 내는 악기들 가을 밤 비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피아노를 치는 담쟁이 잎새 실로폰을 두드리는 방울꽃 바이올린을 켜는 구절초 트럼펫을 부는 나팔꽃 북을 울리는 해바라기 빛이 없는 밤에는 꽃들도 변신해 모두 악기가 된다
비와 바람과 천둥이 함께 어우르는 실은 신神이 지휘하는 자연의 대 오케스트라 연주演奏
낮게 혹은 높게, 작게 혹은 크게 화음和音을 이루는 그 아늑한 선율이여 일상의 소음에 지친 우리를 사르르 잠들게 하는 가을 비 그 빗소리여
오세영 시인 / 사계첩운四季疊韻 기타
봄
어제런 듯 앙상하던 매화 여린 가지들이 이 아침 거짓처럼 꽃망울을 터뜨렸다. 봄에는 없었던 것도 눈에 뵈니 봄이다.
여름
무더위에 지치면 누구나 창문 열고 활활 부채질로 흘리는 땀 식히느니 여름은 그 무엇이든 열어 제쳐 여름이다.
가을
하늬바람 건듯 분 뒤 온 뜰이 낙엽이다. 잎이 진 나무들만 스산하게 서 있구나. 가을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가니 가을이다.
겨울
강추위에 얼어붙어 온 세상이 빙판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차고 맑은 유리벽뿐 거기에 내 참모습 비치니 겨울은 거울이다
우음偶吟
봄 햇살 가득한 바깥세상 엿보다가 남향받이 토굴로 다시 드는 산토끼, 뵈는 것 북향 능선의 잔설残雪밖에 없구나.
-(화중련 2021 상반기 31)
오세영 시인 / 만리장성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멀리서 마냥 바라보기만 했던, 새날이 밝아오고 찬란히 무지개가 뜨던 언덕 너머 그 하늘, 가로막는 장성은 높고 가파르기만 한데
굳게 닫힌 문, 단단한 포루(鋪樓). 해자(垓字)는 간신히 건넜건만 내 휘하엔 병력도 무기도 변변치 않아 다만 펜 하나 들고 이 험한 장벽, 어떻게 깨부시고 넘을 것인가.
탁자 앞에서 오만하게 버티고 서 날 굽어보는 그 벽의 서가(書架),
용기를 내서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 간신히 한 권의 장서(藏書)를 뽑아든다. 부질없이 석축(石築)에 괸 돌 하나를 허문다.
오세영 시인 / 출옥
한 잔 한 잔 비워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야 비로소 갇힌 장에서 풀려나는, 20년산 발렌타인.
포도주든, 위스키든, 막걸리든 술병은 자신을 비움으로써만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찾나니,
혀와 입술이 엮는 관능, 그 한 세상의 감옥.
인생 또한 장기수가 아니던가.
오세영 시인 / 사람 인(人) 서로 등에 등을 기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랴. 어려울 때 슬며시 내주시는 아버지의 등. 슬플 때 넌지시 들이미시는 어머니의 등. 외로울 때 남몰래 빌려주는 친구의 등. 그의 체온과 숨결과 맥박이 고스란히 나와 하나 되어 모진 추위를 막아주는, 이 한겨울밤, 침대가 아니라, 침낭이 아니라 따뜻한 온돌바닥의 등짝이 내미는 그 어부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랬듯 적막한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다.
오세영 시인 / 사랑의 방식-그릇 38
얼릴 수만 있다면 불은 아마도 꽃이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불길을 싸늘하게 얼리는 튜립, 불은 가슴으로 사랑하지만 얼음은 눈빛으로 사랑한다. 어찌할꺼나 슬프도록 화려한 이 봄날에 나는 열병에 걸렸어라. 추위에 떨면서 닳아오르는 내 투명한 이성, 꽃은 결코 꺾어서는 안 되는 까닭에 눈빛으로 사랑해야 한다. 밤새 열병으로 맑아진 내 시선 앞에 싸늘하게 타오르는 한 떨기 튜립.
오세영 시인 / 북양항로(北洋航路)
엄동설한, 벽난로에 불을 지피다 문득 극지를 항해하는 밤바다의 선박을 생각한다. 연료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화실(火室)에서 석탄을 태우는 이 배의 일개 늙은 화부(火夫). 낡은 증기선 한 척을 끌고 막막한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예까지 왔다. 밖은 눈보라. 아직 실내는 온기를 잃지 않았지만 출항의 설렘은 이미 가신 지 오래, 목적지 미상, 항로는 이탈, 믿을 건 오직 북극성, 십자성, 벽에 매달린 십자가 아래서 어긋난 해도(海圖) 한 장을 손에 들고 난로의 불빛에 비춰 보는 눈은 어두운데 가느다란 흰 연기를 화통(火筒)으로 내어 뿜으며 북양항로, 얼어붙은 밤바다를 표류하는, 삶은 흔들리는 오두막 한 채.
-시집 『북양항로』 (민음사, 2017)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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