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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순 시인 / 버들잎 엽서
바람이 불어서 그랬겠지만 못에 떨어진 버들잎이 똑 오리처럼 헤엄쳐 갔어요. 버드나무가 물에 띄워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편지일 것도 같고요. 사랑해, 보고 싶어, 뭐 그런 문장일까요? 확실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집 『단단한 말-철물점 여자』(북인, 2013)
홍정순 시인 / 바람은 가끔 에어가 된다
타카못 소리 어디에나 박히는 그 소리는 짧고, 깊다 가늘디가늘어 철판이면 철판 나무면 나무 콘크리트면 콘크리트에 몸통 째로 박히는 그 것 콤프레샤와 어우러져 폼 나게 들어앉는 그 소리는 솟대로 내려앉은 까마귀 울을처럼 종일 한 소리로 이루어지지만 자리자리 속력을 꽂는 일에는 울음이 없다 상처가 없다 시내 한복판에서도 타카못 소리만 들으면 징소리에 서리화 흔들리듯 절로 흔들린다 땅속으로 발이 빠지고 어깨가 들썩거린다 박히는 건 무엇이든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홍정순 시인 / 신데렐라 구두
나만의 비밀창고에 모셔놓았죠 랄라 신데렐라 구두는 무도회용 날씬하지 않으면 발에 안 맞는 이상한 구두 얼굴 예뻐야 들어가는 요술 구두 허리 굵고 못 생긴 불쌍한 공주는 매장에서의 시간을 부지런히 체크하죠 살 빼려고 시멘트도 번쩍번쩍 들어 올리죠 랄랄라 저녁마다 몰래 꺼내 신어보고는 울기도 하죠 그럴수록 더 열심히 뛰어다니는 운동화 공주 화장할 그날을 위해 생얼로 활보하죠 운동으로 단련된 철의 여자 날씬하고 예쁜 공주는 운동화 공주 오지랖 넓은 평발 인생이죠 랄랄랄라 발 커질수록 점점 작아져만 가는 신데렐라 구두 닦아도 닦아도 먼지 앉는 그 의미 이젠 알 듯도 싶은, 무도회 대신 트럭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는 씩씩한 오일장표 운동화 공주 땀내 나는 미끄럼 방지용 장갑 낀 손으로 오늘도 익숙한 급커브 돌고 돌아 배달 가는 중이죠 랄라룰루 랄랄라
홍정순 시인 / 절정은 한소끔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어슷하게 썬 무를 넣는다 흑백사진 속 얼큰한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동태와 끓고 좋은 한 때는 일시정지 중인데 나무 도마가 허락했을 수많은 생선대가리들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다 ― 야아, 손만 잡아도 애가 섰어야 동명태(凍明太), 칼이 안 든다 가볍다 먼 바다를 향해 풀리는 지느러미 아가미에서 번져 나오는 웃음 맛은 수많은 칼질 뒤에야 비로소 온다 한소끔 끓고 있는 동태도 동백꽃처럼 매운 여인이고 싶은 것도 좋은 때는 좋은 때인 줄 모르고 끓는데 그래서 아직도 끓고 있는 중인데 아버지와 엄마도 난바다 건너편 어디쯤에서 노을빛 전생을 풀무질하는 중인지 그 또한 알 수 없는데
홍정순 시인 / 지난 겨울 난로꽃
난초도 아니었는데 한철 피었던 꽃 그 꽃 져야 하는 4월
마그마 출렁거리는 지구처럼 뜨거운 저 철제 화분을 내일 치워야지 작정하면 슬몃 돌아섰던 겨울이 눈 흘기며 매장 출입문을 다시 열었다
진열대에 올려놓은 진달래와 개나리 수반은 작년 봄의 영수증을 찾아 들고 물어달라며 생떼를 썼다
눈이 오는데 밖보다는 그래도 안이 낫잖아 아직은 온기 그리운 이들이 불꽃 주위를 서성거렸다 4월의 난로꽃 일주일만 더 피워두기로 했다
현금 결재한 진달래와 개나리 앞산에는 재고가 없었다 겨울 하나, 내 안에 백지로 남았다
계산대에 엎드려 낮잠 한참 자고 일어나니 여름이었다
홍정순 시인 / 빠루 -원 이름은 배척이요 애칭은 노루발못뽑이다
서면 물음표요 누우면 낚시 바늘 끝은 다소 벌어져 있다 아래는 좁고 위는 넓다 한번 물리면 빠져나가지 못한다 벽에 기대 선 그의 몸은 늘씬하다 쥐면 제비요 놓치면 코브라 대개 검으나 은빛도 있다 용도에 따라 탐석探石에 쓰이기도 한다 이거 하나면 모든 도둑질이 가능하다 그에게 머리를 물리면 끝장이다 녹은 슬지만 휘거나 부러지지 않는 뽑고 때리고 부수고 다시 세우는 그는, 전신이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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