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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윤 시인 / 해바라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

김경윤 시인 / 해바라기

 

 

너를 보내고 나서

 나는 이제 열정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으리

저 뜰에 해바라기가 그것을 간직하고 있으니,

 

다시 격정의 시대가 온다고 해도

그저, 저 뜰의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 생을 뜨겁게 견딜 수 있으리라

 

 


 

 

김경윤 시인 /어느 봄 대흥사 숲길에서

 

 

벚꽃 화사한 길은 짧고 녹음의 봄은 길다

숲길은 구절양장으로 그늘을 깔아놓고

계곡 물소리는 서편제 가락으로 흐른다

봄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늘에는

상사화 상사화 붉은 상사화

사랑은 애시당초 슬픈 인연이라고

오목눈이 붉은 울음 울고 간다

묵객墨客들이 신선처럼 노닐었던 유선관

전설이 가득한 여행자의 집 문밖에는

차마 피안교를 넘지 못한 발길들이

울울창창 녹청에 물든 뜰만 기웃댄다

어쩌자고 때죽나무 흰 꽃들은 발목을 잡는지

영산홍 붉은 몽매여!

한나절의 산경山徑은 꿈길 같지만

진불眞佛에 이르는 길은 멀고

저 북암 마애여래의 미소도 부질없다

몸은 끝내 산문에 들지 못하고

늙은 보리수나무 가지에 앉은 다람쥐만

계류에 붉은 귀를 씻고 있다

 

-시집 『슬픔의 바닥』 중에서

 

 


 

 

김경윤 시인 / 고비의 저녁

 

 

고비의 저녁은 모음의 나라

어스름이 하늘과 지평선의 경계를 허무는 시간이면

적막한 초원은 모음으로 가득하다

양떼도 낙타도 사막을 건너는 바람 소리도

고비에서는 모음으로 운다

아! 와 으! 사이 그 까마득한 광야에서

ㄴ자로 눕거나 ㄷ자로 걷는 짐승들이

말똥 같은 게르에 말똥구리처럼 기어든다

사막을 달리던 바람도 쉼표(?) 같은 게르에서

몸을 눕히는 저녁이면 각진 마음도 어느새

초원의 부추꽃처럼 부드럽게 돗자리를 깐다

우 우 우 쏟아져 내리는 별빛들을

내 고향 말로 쏘내기별이라 불러도 좋겠다

캄캄하고 막막한 고비의 밤

새끼 잃은 말처럼 나는 깨어나

이 붉은 별에 처음 왔던 조상처럼

무릎을 꿇고 어두운 지평선을 바라본다

오! 하늘과 땅 사이

까마득한 우주의 소리가 들린다

태초의 저녁처럼

모음으로 부는 바람 속에서

모래가 울고 있다

 

 


 

 

김경윤 시인 / 그리운 댓바람소리

- 김남주시인 생가에서

 

 

쓸쓸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날이면

뜨거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워

봉학리 남주형 집에 간다

덕종이형은 또 어느 집회에 갔는지

빈집처럼 고적한 마당귀

장독대에 쑥부쟁이만 우북하다

그늘 깊은 뒤란에는

살아생전 시인의 죽창이 되고

서슬 푸른 칼날이 되었던 청대나무와 조선솔이

여즉도 푸른 날을 세우고 있다

한때 군불을 지피며 하이네와 네루다를 읽었다던

그러나 지금은 곰팡내 나는 행랑채 빈방에서

늙은 농부의 축 처진 뱃가죽처럼 너덜거리는

흙벽을 마주하고 앉아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에 꽂히는*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노래를 홀로 불러본다

어두운 골방에서 제 핏줄 같은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처럼 혼신의 노래를 부르던

순결한 그 사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거미줄만 가득한 그 빈방에서 한참을 앉았다가

저 멀리 두륜산 갈매빛 능선 위로 떠오르는

한 별을 오롯이 바라보다 대문을 나서는데

뒤란 대숲의 칼칼한 댓바람소리가 자꾸만

힘없이 돌아서는 내 발목을 후려친다

 

*김남주의 시 「노래」중에서

 

 


 

 

김경윤 시인 / 나는 땅끝 시인

 

 

천 리나 먼 길

서울의 불빛 그리워한 적 없는

나는 땅끝 시인

마음도 몸도 중심을 버린 지 오래

오로지 오지에서 피고 지는 저 들꽃들과

스스로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텃새들

골목마다 푸른 바람을 거느린 대나무숲과

한겨울에도 눈 속에 붉은 동백꽃들이 나의 오랜 벗이네

한때, 대처를 떠돌던 갈꽃 같은 마음도

중심을 향해 시퍼렇게 자라던 칡넝쿨 같은 열망들도

이제 붉은 황토밭 고구마 순으로 묻어두었네

 

그래도 때로 마음이 사무치는 날이면

갈두나 사구미 어느 주점에 안자

그저 저무는 것들의 그 쓸쓸한 여백을 붉은 물마루에 걸어두고

육자배기 가락으로 우는 파도 소리에 기대어

매생이 국물같이 정 깊은 사람들과 소주잔을 비우겠네

진달래 고운 청명淸明 어름이나

목덜미 시린 입동立冬 무렵이면

그리움으로 단풍 든 마음을 여미고

금쇄동 옛터에 칩거한 고산孤山을 찾아가거나

달마산 미황사 부도전 가는 샛길을 걸어도 좋겠네

 

달 밝은 밤이나 눈 내리는 저녁이면

이동주,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 황지우……

이 고장이 낳은 별 같은 시인들의 시를 읊조리며

느릿느릿 시의 행로行路를 따라서

장춘동 십 리 숲길을 걸어도 좋겠네

 

천 리나 먼 곳

서울의 불빛 그리워한 적 없는

나는 땅끝 시인

눈보라 치는 변방에서

마늘씨 같은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살겠네

 

 


 

 

김경윤 시인 / 불의 경전을 읽다

 

 

누가 한사코 이 먼 이국까지 와서

내 슬픔의 창을 두드리는가

나는 단지 별을 찾아왔을 뿐인데

낭만을 선사한다는 몽골의 별빛 때문에

누추한 게르의 밤을 허락했는데

밤이 깊을수록 바람의 신이 데려간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영하 40도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에서는

바람의 악사들이 켜는 모린호르의 노래

게르의 천창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

눈물이 되어 불꽃을 적신다

난로의 연통에 불꽃만 날고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불꽃이 날리는 것은 난로에 장작이 없다는 것

게르에서 겨울밤을 보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지

마음에 불꽃이 없으면 언어는 단지 연기 같은 것

따뜻한 불을 지필 장작 같은 말 한마디 그리운 밤

바람의 신을 추종하는 연기가 허공에 새긴 만자卍字들

밤새 마음에 새기며 타닥타닥

장작들이 펼쳐놓은 불의 경전을 읽는다

 

 


 

김경윤 시인

1957년 전남 해남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9년 <무크지> 『민족현실과 문학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아름다운 사람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 『 신발의 행자』 『바람의 사원』 『슬픔의 바닥』 등.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