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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상 시인 / 저녁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

이길상 시인 / 저녁에

 

 

아무 일도 없다

하여 내가 나에게서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내게서 멀어진 기억들이

떠오르는 저녁

 

아무렇지 않게 발을 떼지만

 

자신마저 숨길 수는 없고

 

아무렇지 않고

아무렇지 않아서

파고드는 기억들

 

내가 나에게서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지나온 날들이

뼈아픈 저녁

 

 


 

 

이길상 시인 / 수요일의 물고기

 

 

뭔가 잡히지 않을수록

기분이 좋았다

헌책의 모서리에

그려놓은 물고기

눈에 띄었다

누군가 죽었구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내가

그 물고기를 만들었다

흔들어도 깨우고 싶지 않은 어둠

허기진 사람들 곁에서의 아이스크림 맛이 좋았다

허름한 카페 나무계단이 나를 빠져나오고

또 하루가 시작된다

펜을 들자 머리 위로

도시의 하늘이 펼쳐졌다

오늘 밤 처리할 일이 무수히 많거나 없다

부풀어 오르는 저녁은 없다

스위치 더듬다 느껴진 온기

차갑게 식어가고

핏빛 도는 고기에

마음이 놓였다

물고기 그려진 책은

제자리에 꽂히고

몸 안으로 박히지도 않은 가시가 들어온다

냉장고의 얼음 상자가 한 번에 쓸려가고

먼 불빛을 보며 내가 녹아내렸다

​​

-『시사사』2022.여름호 중에서

 

 


 

 

이길상 시인 / 목을 내민다는 거

 

 

버려진 자전거에 나팔꽃이 칭칭 감겨 있었다

자전거의 의지다

그렇게 목 졸리고 싶었던 거다

일산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만취한 젊은 여자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는다

제발 저 좀 집까지 데려다 주세요

순간, 못난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려준 것이

눈물겹게 고마워

자전거는 기꺼이 목을 내민 것이다

누구나 목을 내민 적이 있다 내밀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죽는다 한 번 죽은 자들은

누구도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도 나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

횡단보도 건너편까지가 영원이다

그 여자를 데려다 주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부축하던 팔에 얹히던 왼쪽 젖가슴의 무게

세상엔 딱 그 정도의 무게로 남는 것이 있다

자전거도 녹슬고 나팔꽃도 말라죽었지만

무게는 남아

오랫동안 남아

자전거가 풀이 될 때까지

풀이 자전거가 될 때까지

 

 


 

 

이길상 시인 / 자정의 TV

 

 

읽은 책보다 읽지 못한 책이 많다

다 읽지 못하는 걸 알면서

또 산다

 

일생을 걸어 다닌 나의 신발을 바라보는 동안

거대한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광장의 구름이 보고 싶어졌다

 

아직 소망이 남은 듯한 오후 조용한 음악을 들었다

선율이 머무는 곳을 상상하다가

주먹감자를 날리곤 귀가 아팠다

 

보이지 않는 곳에 사막이 있다

겨울에도 나는 나비가 지나갈 때

나 아닌 내가 싫었다

 

여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지랄 같은 여름이 왔다

하찮은 핑계를 대다가 죽고 싶었다

 

자막 올라간 빈 화면을 본다

영혼을 거부한 영혼들이 가는 곳

 

파란색이 다시 파래져도

놀라지 않는 곳

 

문득 책이 두껍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그'지를 꽉 껴안았다

 

두문불출했다

 

미친 듯이 쓰러지는 저 빛

 

-계간 《열린시학》 2022년 가을호

 

 


 

이길상 시인

1972년 전북 전주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졸업,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사이버 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