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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희 시인 / 달 항아리
시간은 잘 익은 홍시처럼 익어 가고 순식간에 마음을 침식시키고 눈도 귀도 멀어버리게 하고 떠나갈 땐 잔인한 상처를 내고 헤집어 버리고 아별에 대처하고 내 시도 이별에 잘 대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우면 비울수록 채워지는 텅 빈 달 항아리처럼 마음 비우고 내 시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른쪽 다리가 영 불편한 독 짓는 할아버지가 투박한 손으로 항아리를 빚는다 세월을 빚는다 사랑을 빚는다
넉넉한 텅빈 달 항아리, 시를 빚는다
조서희 시인 / 제라늄 향기
열정이 식으면 제라늄 향기가 남아요 한 줌 연둣빛과 세 되 향기. 다섯 섬 가슴앓이 그리움은 버스 창에 매달려 번번이 미끄러지고 마는 빗방울 물이 증발한 후 그릇 가에 허옇게 남는 소금꽃
그리움의 밑변을 문질러봅니다 열정이란 삶의 무게를 분산시키지 못한 채 외줄에 남긴 체중이 아니겠어요 열정은 결국 식게 마련이지요
열기가 식어버린 후 견디기 힘들지라도 그 해어름의 여운이라도 남아 있어야 남은 날들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늦은 저녁 행로를 바꾸는 게 아니었어요.
조서희 시인 / 낙타
낙타의 긴 속눈썹 끝에 지평선이 걸린다. 낙타가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낙타는 묵묵히 제 길을 간다. 서걱이는 모래 바람에 모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늙어 눈물이고 황혼이다. 나와 나 아닌 것들의 벽이 무너지고 지도에도 없는 모랫길이 되는 타클라마칸사막,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다. 낡은 흑백사진 속 부풀었던 사랑이 꺼지듯 눈 꺼풀이 자꾸 감긴다. 세상과 접촉이 끊겨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아 몇 날 몇 밤을 새운 후에야 소리 없는 유성으로 발을 옮긴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굳은살 박인 무릎은 걸음을 포기할 수 없다. 아득한 메아리, 낙타는 터벅터벅 걸음을 뗀다. 목 축일 우물 하나 없이, 초저녁 맑은 허기가 비늘 돋친 혓바닥처럼 핥고 지나간다.
조서희 시인 / 낙타의 뒷모습
지금까지 소리 없는 유성도 모래가 되고 언덕이 되는 내 속의 생각은 자꾸 이탈되고 사막바람에 모래가 운다 낙타가 운다 사선에 서서 너더너덜 해진 낙타의 뒷모습 구부러진 다리가 걸어가고 굳은 살 박인 무릎이 걸어간다 모래 속 한 점이 되어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리는 제 등에 지고 있는 짐이 무겁고 힘들어 얼굴이 찌그러지는지도 모르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바스러지는 낙타는 그 짐을 내려놓을 줄도 모르는 기꺼이 하루를 지고 낙타처럼 살아간다 큰 두 눈을 껌벅거리며 사막 모래 사선으로 발을 옮긴다 낙타의 코끝에서 반짝이는 별똥별을 본다
조서희 시인 / 양평자전거길
문득 가슴이 숨 쉬고 있을 푸른 삼나무 한 그루 그리워 양평으로 길을 나선다 어디엔가 돌아와 누운 가슴 그래도 살아서 잘 살아서 고맙다고 내 굽은 등을 토닥거리는 달리다 머물고 언제라도 쉬었다 가는 햇살 부서지는 팔당호 가녀린 물결 소리 온몸이 빠져 들어가고 지나가는 바람의 비질에도 새순이 돋아난다 페달을 밟을수록 노폐물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쏟아지는 햇살 등을 떠민다 달리다 머물고 머물다 가고 양수 지나 능내 지나 팔당까지 너와 내가 그렇게 익어가는.
조서희 시인 / 섬진강 19번 국도
영화처럼 빨간 오픈카를 타고서라면 더 좋겠지만 오래된 구식 자동차로 달리는 맛도 괜찮다 꽃눈 날리는 섬진강 19번 국도 벚꽃에 하늘을 빼앗긴 지 오래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꽃말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걸어가는 벚꽃들에 정이 핀다 사랑이 핀다 차 지나간 자리 바람 일면 수북이 떨어진 꽃잎 다시 솟구치며 따라오고 연분홍 배웅을 받으며 햇볕이 몸을 뉜 산과 들 오후 3시 강이 느리게 느리게 흐르고 있다 섬진강 건너편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붉은빛 물비늘 강물 젖어 들 즈음 재첩 잡던 섬진강 어부들도 하나둘 포구로 돌아오고 그 배 뒷머리 지지배배 노래 부르던 새들도 따라오고 벚꽃 마음도 그들 따라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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