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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시인 / 패랭이 꽃
꿈도 채 피기 전부터 바람벽 하나 없는 너른 들 한켠에 던지워져 무성한 잎도 피워 보지 못하는 한이 맺혀서 줄기마다 마디마디 마디 졌는가...
솔소 이는 맑은 바람 마셔 살아도 가냘픈 잎사귀 살 오르지 않아 가는 솔바람에도 파르르 떨고 있구나
초여름 무성한 풀섶에 새벽 이슬 맞아 피운 가냘픈 꽃잎 녹음 속의 빠알간 향기가 아름답구나
마디진 줄기도 가냘픈 잎새도 홑으로 핀 꽃잎마저도 카네이션을 닮아 어머니를 생각케 하는 초여름 풀섶의 빠알간 패링이꽃...
최병호 시인 / 엄마의 삶
나도 그렇게 살래요 남은 세월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래요
존경받기보다 겸손하며 존경하기 힘들고 어려워도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래요
손 내밀어 받기 쉬워도 엎드려 바치던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래요
억압받고 오해받아 정의감에 억울해도 진리에 순종하던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래요
육신이 고되어도 양심의 눈 바로 뜨고 헌신하던 모습 따라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래요
내 몸 사루어 불 밝히는 양초 같은 엄마처럼 그렇게 나도 살고 싶어요.....
최병호 시인 / 면面*에서 자라는 것들 시간은 면에서 왔는지 모른다 아침 햇살이 활엽수 이파리에 부서지듯 널브러져 있을 때 더 자유롭다 시작도 없이 계속되다 지치면 함께 엎드린다 가슴 속에서 기억을 꺼내는 순간 시간은 새롭게 생산된다 노래는 앞과 끝이 없었는지 모른다 시간의 순서를 정하다 보면 노래가 되고 우리들은 모두 면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것일까 그래서 밖은 처음부터 깊은 곳에서 시작됐나 늘 시간의 관자놀이에서 턱밑까지 손을 뻗치는 이유다 혼돈에서 질서가 자랄 때 노래가 시작됐는지 모른다 우리는 밖일 때 생각이 더 깊어진다 면은 혼돈을 키우고, 혼돈 속에서 우리는 더 자유롭다 시간이 지치면 면이 되고 면에서 노래는 자란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 8'에서 '구성2를 위한 스케치‘에 이르는 거리
최병호 시인 / 새끼여우발톱
별들의 휴가지 덕산기 계곡에서 여우 발을 닮은 꽃 하나 만났습니다 발걸음 따라 전화가 연결되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는 곳 숲속 책방 갈참나무 그늘에서 정선의 별을 닮은 이름 하나 가지고 있을 작은 꽃 하나 만났습니다 눈발 같은 꽃의 이야기를 잘 찾을 수 없어 이 갈참나무 그늘에서는 오이 이파리처럼 손이 위로 뻗어 나온 너를 새끼여우발톱이라 불러도 될까요 산물에 발목을 서너 번은 적셔야 오를 수 있는 덕산기 계곡을 벗어나면 하얀 티눈 같은 꽃 원래 이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휴가를 낸 이곳에서는 새끼여우발톱으로 불러 주세요 추운 겨울을 틈타 북쪽의 여우들이 계곡까지 왔다면 눈을 뒤집어쓴 몸을 털다 작은 눈발 하나씩 떨어진 자리에서 네가 피어났다면 눈발처럼 작지만,계곡의 별을 다 담을 수 있는 큰 하늘을 가지고 있겠죠 눈이 커서 큰 하늘을 다 담을 수 없는 꽃 새끼여우발톱
-『김포문학』40호
최병호 시인 / 면面에서 자라는 것들 3
대화역에서 열차에 올라타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말 플랫폼을 어지럽히고 있다 웅성거림은 불규칙한 선에서 시작하는지 데시벨에 비례해서 마음들을 실어 나르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네
이상하다 주말이라 사람들은 갈 길을 접고 잠시 카페에 들르고 싶었던 게로군 주말은 왜 이렇게 여분처럼 아름다운 것일까 열차도 버리고 다른 길로 빠져드는 사람들
토요일만 가능한 일이지
반대편 플랫폼 빼곡히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말해주지 말아야지 누군가 멍청하게 건너편에서 허탕을 치고 있다면
아까 펼쳤던 시집의 페이지가 어디였더라 '전주'였나 '부고'*였나 때마침 열차는 출발하고 다시 시집을 펼치면 되겠지
어느 틈에 지상 구간을 달리는 열차에서 암호 같은 말들을 내뱉던 소녀들은 자꾸 표정이 밝아지고 다시 시집을 펼치지 못하네
창릉천에서 작은 꽃들의 풀냄새를 맡으며 맞을 일인데 시속 80km의 속도 위에서 잠시 봄은 지나가고 오늘 종각역에서 읽기로 한 시가 뭐였더라
이렇게 맞아도 될까 봄은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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