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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순갑 시인 / 길위에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

홍순갑 시인 / 길위에서

ㅡ여행 길

 

 

지도를 펴 본다

멕시코 쿠바 과테말라

정글속 마야 문명을 찾아서

하회탈 같은 시인이

한달간 나그네 길을 떠났다

길을 묻고

하루 또 하루 걷는다

과테말라에서 사진이 왔다

인디오들의 문명과 몰락

띠깔 유적지의 웅장함

마야인들이 이룩한 업적에

경배하는 나그네가 보인다

돌아올 때는 큰 눈과 가슴에

부처가 들어있을 것같은

느림의 미학

여기 갇혀진 시간에도 두둥실

덩달아 쉼의 가락을 늘린다

 

 


 

 

홍순갑 시인 / 아내의 미소

 

 

 아내는 늘 웃는다 다시 보니 젊던 시절의 웃음보다 훨씬 더 곱다  왜 웃느냐고 물으면 웃어야 편하단다 아내는 집안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웃는다 아들 셋을 군에 보낼 때에도 웃었다 아내의 웃음 속에는 울음보다 더 깊은 삶의 고통이 배어 있다 눈꼬리와 콧잔등에 주름살이 인다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한가지만 생각하신다 매일 가방에 헌 옷가지를 꾸려 고향 집으로 가자고 조르면 아내는 웃는다

 

 


 

 

홍순갑 시인 / 간고등어

 

 

어느 깊고 푸른 바다에 살았나

어둠 속에 가라앉아 한 여자 울고 있네

쉬 눈물 마르지 않네

빈집 같은 여자 가진 것 다 내주고

텅 빈 채 깊이깊이 울고 있네

남은 것은 껍데기뿐이네

생의 파도 견디느라 무던히도 거칠던 바다

짜디짠가슴 절여

깜깜하게 둥지고 한없이 흐르네

 


 

 

홍순갑 시인 / 갠지스 강에서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강을 마주한 채

유유히 흐르는 시간을 내려다보면서

강의 시원을 찾아 아득한 먼 고장을 헤매고 있다.

장작더미 위에서는 시신이 타고

벌거벗은 사두는 명상에 들어 있고

먼 데서 온 순례자들은 죄로 물든 영혼을 씻어내고

아이들은 느린 시간 속으로 신나게 뛰어든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가슴에 품고 흐른다.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시간이 지향하는 곳은 언제나 아래쪽이다.

 

-2010년 『남한강문학』 《남한강문학회》에서

 

 


 

 

홍순갑 시인 / 나는 땅에다 시를 쓰네

 

 

나는 땅에다 시를 쓰네

언제부턴가 나는 땅에다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글자도 없고 그림도 없는 내 시는

땅을 파 골을 내거나 거름을 주거나

웃자란 풀을 뽑거나

폭염 이글대는 날 물 길어다 주거나

작은 씨앗 조심조심 흙 속에 묻어주거나

서툴게 모종을 심기도 하는 것이네

때로는 혼자 두런거리며 땅에다 시를 쓰네

혼잣말이 씨가 되어

뿌리 내리고 싹 틔워 조금씩 자라네

줄기가 자라고 새잎이 나오고

내가 바라보지 않는 사이에도 꽃이 피네

저것이 내 시라고 아내에게 말해주네

땅에다 시를 쓰는 일은

허리 아프고 팔다리 아프고 땀도 많이 나네

시를 쓰는 일은 외로운 일이네

바람이 흐르고 뭉게구름이 흐르고

어느덧 가을이 왔으니 거두어들여야 할 때,

거두는 일은 쓰기보다 어렵네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 같은 것

목숨닮은 시 한편을 거두기 위해

땅에다 맨몸으로 쓰네

 

-《호서문학》 2018년 겨울호

 

 


 

홍순갑 시인

1949년 충남 연기 출생. 1990년《호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깊이 들여다보다가> <빛과 그림자에 대한 명상> <저달을 보라> <조용히 빛나는 것은 붉다> <누가 나를 부르는가> 등. 현재 호서문학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