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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갑 시인 / 길위에서 ㅡ여행 길
지도를 펴 본다 멕시코 쿠바 과테말라 정글속 마야 문명을 찾아서 하회탈 같은 시인이 한달간 나그네 길을 떠났다 길을 묻고 하루 또 하루 걷는다 과테말라에서 사진이 왔다 인디오들의 문명과 몰락 띠깔 유적지의 웅장함 마야인들이 이룩한 업적에 경배하는 나그네가 보인다 돌아올 때는 큰 눈과 가슴에 부처가 들어있을 것같은 느림의 미학 여기 갇혀진 시간에도 두둥실 덩달아 쉼의 가락을 늘린다
홍순갑 시인 / 아내의 미소
아내는 늘 웃는다 다시 보니 젊던 시절의 웃음보다 훨씬 더 곱다 왜 웃느냐고 물으면 웃어야 편하단다 아내는 집안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웃는다 아들 셋을 군에 보낼 때에도 웃었다 아내의 웃음 속에는 울음보다 더 깊은 삶의 고통이 배어 있다 눈꼬리와 콧잔등에 주름살이 인다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한가지만 생각하신다 매일 가방에 헌 옷가지를 꾸려 고향 집으로 가자고 조르면 아내는 웃는다
홍순갑 시인 / 간고등어
어느 깊고 푸른 바다에 살았나 어둠 속에 가라앉아 한 여자 울고 있네 쉬 눈물 마르지 않네 빈집 같은 여자 가진 것 다 내주고 텅 빈 채 깊이깊이 울고 있네 남은 것은 껍데기뿐이네 생의 파도 견디느라 무던히도 거칠던 바다 짜디짠가슴 절여 깜깜하게 둥지고 한없이 흐르네
홍순갑 시인 / 갠지스 강에서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강을 마주한 채 유유히 흐르는 시간을 내려다보면서 강의 시원을 찾아 아득한 먼 고장을 헤매고 있다. 장작더미 위에서는 시신이 타고 벌거벗은 사두는 명상에 들어 있고 먼 데서 온 순례자들은 죄로 물든 영혼을 씻어내고 아이들은 느린 시간 속으로 신나게 뛰어든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가슴에 품고 흐른다. 천지창조의 순간부터 시간이 지향하는 곳은 언제나 아래쪽이다.
-2010년 『남한강문학』 《남한강문학회》에서
홍순갑 시인 / 나는 땅에다 시를 쓰네
나는 땅에다 시를 쓰네 언제부턴가 나는 땅에다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글자도 없고 그림도 없는 내 시는 땅을 파 골을 내거나 거름을 주거나 웃자란 풀을 뽑거나 폭염 이글대는 날 물 길어다 주거나 작은 씨앗 조심조심 흙 속에 묻어주거나 서툴게 모종을 심기도 하는 것이네 때로는 혼자 두런거리며 땅에다 시를 쓰네 혼잣말이 씨가 되어 뿌리 내리고 싹 틔워 조금씩 자라네 줄기가 자라고 새잎이 나오고 내가 바라보지 않는 사이에도 꽃이 피네 저것이 내 시라고 아내에게 말해주네 땅에다 시를 쓰는 일은 허리 아프고 팔다리 아프고 땀도 많이 나네 시를 쓰는 일은 외로운 일이네 바람이 흐르고 뭉게구름이 흐르고 어느덧 가을이 왔으니 거두어들여야 할 때, 거두는 일은 쓰기보다 어렵네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 같은 것 목숨닮은 시 한편을 거두기 위해 땅에다 맨몸으로 쓰네
-《호서문학》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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