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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후 시인 / 樂器
한 그루 소리에 매인 가지들이 문을 닫고 모든 소리는 사라지는 쪽으로 옮겨 간다 이때 현絃은 끊어져 있다
줄이 끊어진 악기가 벌판에 오래 서 있다 바람이 열리지 않는 소리를 두드리다 돌아가고 전정剪定한 가지들 빈 틈마다 음표들이 돋는 봄이 되면 푸른 손들이 현에 달라붙을 것이다 조만간 날아오르는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될 것이다.
화두話頭가 방음에 붙어 녹슬어 가고 있다
미처 감기지 못한 짧은 탄성이 내는 계절 되돌아오지 못하는 소리를 잘라 귀를 키운다. 공중조율에는 실음이 손끝에서 버려지고 연주가 없는날, 적요한 햇빛만 무음으로 가지를 휘고 있다 현이 돋아나는 날씨 공명이 몰려오는 곳으로 꽃들이 졌다
소리가 여럿이 되는 무렵 수십 줄의 현에서 검은 음이 떨어져 넓어질 것이다. 지난 겨울 부러진 가지 들에는 불구의 소리가 있고 단단해진 목질의 내부에 무기 가득한 악보가 길다
소리를 모으는 곳은 가지 끝이 제격이지만, 가장 높은 음은 가장 먼저 끊어지기도 하여 흩어지는 곳 또한 가지 끝이 제격이다
김은후 시인 / 문명의 거주 비용
비워놓은 집이 메일을 보내왔다
제목: 1월 전기요금 청구액 160,720
장작불 아궁이 대체 요금이자 빈집에 독처한 문명의 거주비용이다 집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역할들 종류는 따로따로이다 저장고에는 겨울에도 웅웅거리는 냉기가 돌아가고 문 안팎 두루 응시하는 무인경비시스템의 렌즈 심야전기 보일러는 온기를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통합 경비원, 문명이다
예민하기는 빈집이 더해 지나가는 소문이 멈칫거리기만 해도 헛기침 같은 소리가 자자할 것이다 무인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공간뿐일까 보일러는 무인의 계절을 쌀쌀하게 덥히고 있고 우리는 외출이라는 거짓말을 설정해놓는다
거짓말의 온도 12도 거짓말을 굳게 믿게 하는 값, 한 달에 16만 원 정도 문명의 고지서를 무인공과금 수납기에 밀어 넣고 마그네틱 암호로 문명의 값을 지불한다 ‘명세표를 수령하십시오.’ 달랑 얇은 영수증 하나 손에 쥐어 준다 혓바늘 돋은 겨울바람에게 악수를 청한다 장갑을 낀 채
-시집 『분간 없는 것들』 2016. 시인동네 시인선
김은후 시인 / 빗장(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때 열쇠를 본 적 있어? 열쇠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일 걸 아니야, 그렇게 좁은 문은 꼭 잠근 손가락이 있다고 했어
숟가락 꽂혀 있던 빈방을 본 적 있어? 빈방이라면 빗장을 걸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도 꼭 밥 한 그릇만큼 재물이 있다고 그랬어
최초의 자물쇠는 돌아선 마음이었을 거야 숟가락은 잠그는 것 같지만 오히려 기다리라는 신호 같았어
낙타는 여벌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까 거리두기란 불길한 잠금이 생겼어 바늘귀를 잠근 아주 작고 험한 가시야 변덕이 심해서 열쇠를 베끼지 못한다는데 바늘귀를 여는 숟가락이 생겼어
'음성입니다' '접종 완료 14일이 지났습니다 험지의 손가락들이 빗장을 풀 비밀번호들
- 월간 《현대시≫ 2023년 2월호에서-
김은후 시인 / 서북쪽으로 밀리는
나는 나무를 그릴 때 뿌리를 그리지 않는 버릇이 있다
땅이 도면보다 모자란다는 소문 모자란다는 것은 뿌리를 서북쪽으로 두었다는 것 실선 하나에는 지각변동이 숨어 있다 무너지지 않는 서북쪽으로 밀렸으니 다행이다
등기 문서에서 50여 평이 날아갔다 땅들이 서로 등을 떠밀었을까 다음날부터 집 앞 계단 네 번째까지 오던 햇볕이 세 번째에서 끊어졌다 집 모퉁이에는 일곱 송이 수선화가 피었는데 어제만 해도 햇살이 일곱 송이 다 비치더니 오늘은 세 송이만 비치고 가버렸다
말할 수 없는 힘이 경계를 밀고 있다 그 방향이 지구 자전 방향과 관계하고 있다면 푸른 모니터가 할아버지 땅을 삼켜버린 힘이다
GPS가 전설의 영향권에 들면서 큰 나무 뿌리들은 밤마다 오므라들었다
리투아니아의 전설을 생각한다 신으로부터 받은 재물은 측량하면 종잇조각으로 변한다*는
*요정으로부터 받은 재물을 세거나 계산하면 그 재물이 종잇조각으로 변해버린다는 리투아니아 민간 설화 변용.
김은후 시인 / 숙주 조정
이웃이 될 거야 남의 몸속에 제 집을 짓고는 짐짓 동화를 읽어준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경전을 실천하는 거야 선충*의 경전은 밀림개미 배를 빨갛게 익히고 새들은 잘 익은 개미를 먹고 개미는 또 새똥을 주워 먹고, 먹고, 먹어 새들은 앉고, 개미들은 날고.
기생의 한때는 어느 뱃속에서도 소화되지 않는 매직 매직과 경전의 공서(共棲) 용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도 내 몸속에 살고 있는 끈질긴 죽음 다른 곳으로 옮겨 가지도 않는 모두의 죽음 이도 알고 보면 기생일 것 죽음과 내가 숙주의 자리를 놓고 교차되는 의심
밤늦은 시간, 학교 앞마다 주정차 금지 구간에서 기다리는 부모들 저 교문 안쪽엔 어떤 선충이 한때의 위반을 조정하고 있는 것일까 의심 들지 않는 것이 혈연이지만 새들이 수시로 고개를 갸웃거리듯 가끔 나는 의심이 든다
각인된 행동의 반복이 지워지는 만큼 반복되는 기생 지난봄, 산불이 지운 숲의 각인마다 어린 묘목들이 파랗다.
* 선충(Myrmeconema neotropicum): 밀림개미의 기생곤충.
김은후 시인 / 발끝에 악마가 살고 있어요
늦겨울 저녁이 축축이 비에 젖어 있고 아이는 게임에 빠져 있다 아이의 발을 덥석 잡았다
아, 아, 발끝에 악마가 살고 있어요
열중한 틈을 타 아이의 발이 지릿지릿한 악마가 파고들었다 그 시간 천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서 코끝에 침을 발라봐
천사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자 아이는 악마를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한다
악마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저만큼 멀리 뛰어가 버렸다 꽅끝의 천사에게 쫓겨난 악마, 코끝 천사를 아이에게 빼앗아 기억의 바다로 던져버렸다
지릿한 암시 보내기를 좋아하는 그리 사악하지 않은 악마를 만나려면 축축한 저녁 무렵 한참을 침잠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그리고 되도록이면 양반다리를 하고서 겹쳐진 생각에 골똘해야지
부르르 진저리치게 하는 악마, 내게는 하나쯤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 비가 오지 않을 때면 아이와 함께 일몰의 시간이라도 내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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