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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야 시인 / 잊힘에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

이제야 시인 / 잊힘에게

 

 

잃기 쉬운 마음에게서 멀어진다

사계절이 선명했던 그림들에서 하나씩 지워나가는 시간

잊기로 한 날들이 읽기 위웠던 마음처럼 다정해지는데

낮에 뜨는 달이 너를 향한 꿈이고 싶던 적이 있다

지나간다 그 말이 잊어가는 속도를 위로할 수 있을까

붙잡을 수 없는 그림자들이 많아지는 밤

한때였지. 사랑하지 않을 만큼 잊히고 싶지 않은 때가

그림자에게도 낮에 뜨고 싶은 꿈이 있었다

이름을 가진 여느 날들을 살아가는 건 잊히는 사람의 일

사계절이 없는 그림에 그림자를 놓았다

오늘도 짚 앞에는 이미 마른 낙엽에 물을 주는 사람이 있다

잃기 쉬운 시간들이 우리에게 많았다.

 

 


 

 

이제야 시인 / 가장 작은 위로

 

 

걷다 보면 만들어지는 길이 있었다 새겨진다는 것

누구에게 정직하고 싶었던 날에 매일 길을 걸었다

작은 사소함으로 지키고 싶던 날들 마음의 묵묵함으로

애쓰는 만큼 다정해지고 쓸쓸해지는 만큼 깊어진다고

때로는 내가 위로할 수 없는 나의 시간 속에 있다

익숙함이 만들어낸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계절에는

매일 걸어도 한 걸음도 가지 못한 낯선 내가 있었다

가장 뜨거웠던 시간에서 담담한 혼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주 작은 의자에 앉은 내게 가장 작은 위로를 건네고

무엇이 되고 싶던 시간들은 오후 어디쯤에 걸어두고 걸었다

노래를 불렀다 시간을 엮어서 라임나무에 걸었다

바람도 그리운 쪽으로 분다는 오후의 습관처럼

어린아이도 사랑을 하면 주름이 생기는 동화를 믿었다

마음을 모음이라고 잘못 쓴 밤이 있었다

 

 


 

 

이제야 시인 / 벽의 장르

 

 

흔적을 걸어두면, 그림이 될까요

 

정물화가 걸린 벽에서

움직이지 않는 감정들을 바라봅니다

한때는 오른쪽에 한 때는 왼쪽에 두었던

언어보다 사랑스러운 배치에 대해 생각합니다

날아가던 바람이 왼쪽에 앉을 때

정지한 사물들이 휘청이기 시작합니다

 

풍경화가 걸린 벽에서

껴안은 구간의 감정들을 바라봅니다

여기에서 저기까지만 싹둑, 한 계절로 담았던

편집된 공간에 대해 생각합니다

지나가던 구름의 손이 다른 곳을 더듬을 때

나무와 지붕의 대사가 달라집니다

 

그림을 걸어두면, 흔적이 살아날까요

 

 


 

 

이제야 시인 / 시간과 보낸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는

시간이 하는 일을 보았다

 

시간의 얼굴을 닮은

나의 의자에서 시간을 만났다

 

시간의 팔을 보는 일은

매일 쓰는 글자를 되감는 일

시간의 다리를 보는 일은

매일 걷는 바닥을 두드리는 일

 

내가 이름 지은 시간은

팔과 다리가 저린, 반복의 춤

 

나의 의자에도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는

처음으로 시간이

변명 없이 느리게 갔다

 

내 권태가 건강해졌다

 

느린 시간이 이제

빨라질 것도 같다

 

 


 

 

이제야 시인 / 쓸 수 없어서 사랑이 되는 이야기

 

매일 서로의 말을 쓰다듬는 꿈을 꿨다

웃는 이마에서 입술까지 퍼지는 말들이

쓸 수 없는 온갖 사랑을 만들고

묵묵한 끌림이 탄생하는 날이야

늙은 시간을 건널 힘을 가질 것처럼

온갖 사랑이 온갖 언어가 될 것 같았지

오해는 왜 언제나 끌림 뒤에 서 있을까

눈썹만큼의 거리에도 닿지 못한 말이 있었다

달콤한 사과가 되기까지의 과육의 표정들

무수한, 속의 시간들에서 버려지는 말들

우리는 온갖 언어를 오해하며 자랐다

뜻을 몰라도 채워지는 공백의 언어들과

처음부터 오해로 기록되는 사전을 품고서

두부를 부두라고 말하던 어린아이는

설움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었지

서로의 말을 접으며 잠에서 깼다

쓸 수 없어서 사랑이 되는 말들이 있었다

​​

웹진 『문장』 2024년 1월호 발표

 


 

 

이제야 시인 / 조만간의 일

 

 

누구나의 이름에서 갓 잊은 누가 생각난다

 

뜻이 없어도 반응하는 저림이 있다

자세를 가진 동의어들이 당신이 될 때

세상 모든 사물의 첫 획이 같다고 믿었다

 

마른 원두 가루에서 갓 내린 커피 향이 난다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마주 앉은 것이 사람만은 아닐 때

아직 잔이 뜨거울 수 있다고 믿었다

 

1년 전 사건이 오늘의 근황이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고도 끊길 때

존재감은 존재 없이도 그림자를 가졌다

 

시계의 초침은 화살표가 아니니까

 

어떤 일은 조만간,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으며

 

 


 

 

이제야 시인 / 바삭 마른 금요일의 꽃

 

 

꽃잎이 수첩에 붙어 있다

 

날짜의 노래를 들었다

 

한때 활짝이 최대의 포옹이라 믿었다

피어나던 감정 과잉이

바삭 한 줌에 적당한 안녕이 된다

담담해 줘, 담백한 맛을 부탁했다

열망은 겹겹의 시간에 다시 맴도는데

 

감정 없는 감정 앞에 남은 향기에

살아나 줘, 살아 있으라고 말했다

향은 옷깃에 묻혀 다시 환생하는데

 

꽃잎을 해부했다

 

가장 꽃다운 건강은 무엇일까

말랐다는 건 아팠다는 것

말라 갔다는 건 아픔을 건넜다는 것

마르고 있다는 것은 더 아프겠다는 것

 

향기를 뺀 촉감이 꽃의 자서전이 될까

 

말랑했던 그녀의 화요일이

바삭 마른 금요일이 된 것으로도

꽃잎은 충분히

이성적이었는데

 

바삭 한 줌에 다음 열정이 충분히 말라간다

 

 


 

이제야 시인

1987년생.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2012년 《애지》로 등단. 산문집 『안녕, 오늘』 『그곳과 사귀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