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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 파리지옥
하양장이 서던 날, 백반 정식 소문난 중남식당은 파리지옥이었지 미식가라 자칭하던 것들이 잔칫날인 듯 차려진 밥상 위로 펄펄 끓는 국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어 입맛 다시는 노마드 청춘들 천장이 내려 준 구름다리 타고 올라가 걸쭉한 훈장처럼 박제된 양 날개 까마득한 허공만 파먹고 살아도 지상에서 영원으로 갈 수 있는지 산해진미 눈앞에 둔 처절한 전쟁터 입맛 찾아 떠돌던 여자 허기진 한 때, 모처럼 채우고 있었지 군내 나는 청국장쯤으로 여겨 밀친 사내도 제철음식 최고라 편식하던 그녀도 우화를 꿈꾸는 집파리처럼, 사흘을 채 못 넘기던 부나비 사랑 기둥서방처럼 껴안다 불어터진 달콤한 지옥
문현숙 시인 / 예열과 후열 사이
진눈깨비 뿌리는 늦은 밤 가로등 불빛, 트럭 속 두 그림자 덥히고 있다
성긴 눈발처럼 눈시울 붉히며 펄럭이는 여자 등을 토닥이는 남자는 흔들거린다
IMF 파고에 혼기 놓친 여자 울컥,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뜨겁게 서로 보듬어 안을수록 꽃잎이 지는 소리 유난히 컸다
세상 죄 하 많아도 서로에게 지은 죄는 속량이 빠른지 여자는 남자의 봄을 예열하고 남자는 여자의 언 겨울을 데운다
깊은 어둠을 걷어내는 와이퍼처럼 세상 속 다시,재진입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는 힘차게 액셀을 밟는다 텅 빈 거리가 가장 느린 속도 앞에 길을 열어주고 있다
문현숙 시인 / 개기월식
부뚜막에 고봉밥 한 그릇 흰 고무신 한 짝 비스듬히 세워놓고 밥물 끓어오르는 소릴 듣는 아부지
촛농이 신발보다 높게 쌓인 밤 달이 보이지 않는다
달그락 달그락 어린 남매들이 생쥐처럼 둘러앉아 냄비 밥을 갉아 먹다 언제 와?
담뱃재를 털고 있던 아부지가 소주잔을 들이키신다
교회 첨탑의 빨간 십자가보다 더 빨갛게 입술 바르고 외할머니 댁 가신 울 엄마
문현숙 시인 / 노을을 익히다
암술 담아 올린 샛노란 꽃잎들 공중으로 날개 풀어 헤쳐 황홀한 뜻 하나 새겨 두려는 듯 걸어온 길 되짚어 본다 새벽까지, 누운 노을을 닮아갔을 것이다 담벼락에 기대 오른 하늘 한 칸 곱게 불 타 오를 때까지 디뎌온 발자국마다 때론, 되돌리고 싶은 외마디 줄에 매달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입맛 다셨을 것이다 날 선 칼날을 닮았거나 갓길 없는 생, 고비마다 넝쿨이 되고 생채기 난 천만사마다 노을이 지는 쪽으로 귀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게 무대를 마감하고 싶었을 애호박 한 통 온몸으로 하늘을 인 채 허공에 띄운 등화燈火가 되어 노을을 끌어안고 둥글게 늙어갈 붉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문현숙 시인 / 하차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거리에서 하차한 한 구의 주검을 보았네
속살들 어디 가고 발가벗겨진 생, 낱낱이 파헤쳐진 채 떨어진 잎새와 함께 한때, 날개 였던 털들이 아스팔트 위를 서성서성 굴러다니고 있었네
땅만 보고 살았네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새, 없이 죽어서도 날지 못할 땅으로만 기어 다니는 바퀴에 갇혀
밤과 낮, 그 새 사람에게 길든 먹이 찾아 헤매던 퇴근 시간 사거리에 이르러 맨땅에 납작 엎드린 채, 구구구 통성으로 기도하는 비둘기
십자가 붉은, 구원의 등 켜는 동네 어귀 정류장에서 하차 벨을 누르네
가까운 듯 먼 듯,
-계간 『문예바다 (2022년 봄호)
문현숙 시인 / 바람의 수화手話
침묵은 침묵이 알아듣고 고요는 고요가 알아들어 저절로 깊어지는지
미루나무 이파리는 귓등을 타고 올라 말속 말을 찾아 내게 말하죠 나무의 말,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어 덥석, 마음 먼저 쏘아 올려도 만질 수 없는 당신
내 발걸음 소릴 내가 들으며 산소 가는 길 바람이 끌어다 놓았나 당신, 발걸음 소리 천천히 뒤 따라 걸으며 괜찮다, 괜찮다 이만하면 괜찮다 가지를 흔든다
만져지지 않는 바람의 수화를 옮겨 전하는 이파리들 그 낮은 속살거림이 묘비명 새겨진 묵언의 말씀되어
흠칫, 놀란 내 목덜미를 만지면 아버지 천 갈래 만 갈래 다녀가는 소리
절로절로 깊어가는 그, 소리들
(서정시학,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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