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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시인 / 피동형의 밤
원격조정자 7이 퇴장한다 내가 넘기는 도시의 화면은 씁쓸하다 자동차의 경적이 빵빵하게 화면에 어둠을 채워 넣는다
금붕어는 꼬리 흔든다 노이로제를 멈추려고, 붉어지는 생각, 어항은 깨질 준비가 되어 있다
머리로 시를 쓰는 일은 새를 찢어서 울음을 꺼내는 일, 이 도시의 연대기에는 너무 많은 시인이 울음 유전자를 분석하다 새와 고양이를 멸종시켰다고 쓰여 있다
식탁 밑으로 동전이 굴러간다 동전은 지갑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노숙의 감정을 담기에 동전은 유용하다 동전처럼 작아지지 않으려면 네온 십자가와 함께 붉은 꽃의 칵테일을 몇 잔 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밤에서 꺼내는 것은 꽃인가 칼인가 당신이 꺾으려고 혹은 꺾지 않으려고 바라본 꽃잎들은 회전 톱날 같다 꽃과 칼은 ‘베인다’는 피동사와 공범의 관계
고층빌딩의 불빛을 스펙처럼 걸치고 밤은 제 외모에 취해 있다 덩치 큰 그림자는 가끔 주인을 삼켜버린다 춤과 노래를 뒤집어쓴 어항, 퇴폐적이고 화려한 화면 속에 원격조정자 7이 심어놓은 파일이 있다 아무리 클릭해도 비상구가 열리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어둠일까? 밤이 빌딩 사이에 끼어놓은 어둠은 끝없이 소비되는 유성물감이다 죽은 별의 눈물과 누군가 당첨된 복권이 흘러내리기 좋은 장소라고도 생각한다
피동형의 밤, 이상하게 적응되는, 자본과 파도와 세면대의 강박증처럼
김은호 시인 / 잠의 행방을 추궁한다
잠을 타고 멀리 가야 한다
강박증 냄새나는 이 문장을 어느 낯선 여인숙 때 묻은 베개 밑에 묻고 와야 하나? 밤과 꿈 사이에 차마고도, 음악이 덜컹거리는,
깨진 백미러 속으로 허겁지겁 험한 풍경이 달려온다
잠들지 않는 호수가 물고기와 빵을 기다린다 목이 긴 꽃병이 잠에게 바치는 꽃의 이름은 로즈메리
지난밤은 슈퍼맨처럼 비행기 날개 위에 서서 날다가 꿈 밖으로 추락했다 회수된 블랙박스는 쉽게 해독되었다 전립선 비대증을 혐오하는 아프가니스탄 산악 반군들의 스팅어 미사일이 나의 심장을 겨누었다
고통은 누군가 너를 슬퍼하는 것이라고 바스락거리는 달, 무덤 속 파피루스처럼 잠의 그림자가 희미하다
“꿈이 비대해진 게 보이지요?” 의사는 부풀어 오른 내 보랏빛 꿈의 회로를 열어 보였다 잠은 불면기행(紀行) 파일에 저장되었다 애증의 화석들 박혀 꿈틀거리는 터널이 나를 불협화음으로 연주한다
잠을 수리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잠은 계속 통화 중,
듣지 못하는 귀를 주렁주렁 단 사람들의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어둠을 뚫고 날아든 새의 부리가 콕콕, 잠의 행방을 추궁한다
김은호 시인 / 간빙기
분홍빛 세상으로 가는 길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굿바이……
그녀의 검고 긴 머리에서 글썽거리는 눈발들 울지 않으려고 부르는 노래의 악보처럼,
빙하기를 건너온 노래 한 곡이 겨울나무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다
김은호 시인 / 음악에는 너라는 나비가
낯선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물수제비뜨듯 건너가는, 여보세요
수화기 속의 침묵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속눈썹처럼 떨리는 시간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저쪽으로, 밀항자처럼
시간의 울타리 너머 무교동 르네상스로 자작나무숲 푸른 의자가 있는 곳으로
피아노 건반을 달리는 라흐마니노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비의 북방한계선에 가닿은 바람이 숲의 야윈 어깨를 흔들었다
저쪽에서, 나비 팔락거리는 소리
음악의 손끝에서 검고 붉은 무늬의 기억들이 마술처럼 날아올랐다
김은호 시인 / 별똥별
등잔 불빛 같은 봄을 수소문하는 저녁
전화벨 소리가 형광등 불빛처럼 창백한 택배기사의 음성으로 이어진다
비정규직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사료 포대를 따끈한 호빵 하나,등잔 불빛 감귤이 맞아준다
한 입 깨문 달이 그의 얼굴에서 떠오른다
고맙다는 말조차 잊은 그와 내가 순간, 달빛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
-아득한 산골짝 작은 집에 아련히 등잔불 흐를 때……
비탈길 내려가는 트럭의 빨간 꼬리등이 별똥별처럼 어머니 계신 곳으로 흘러갔다
-현대불교문예<마하야나> 2018, 가을호
김은호 시인 / 망초꽃 송달*送達
누런 봉투 속에서 낯선 문장들 쏟아진다
우체부가 건네준 법원 서류의 차디찬 문맥을 더듬는다
남자는 바닥으로,
남자는 밑 빠진 독을 지고 간다 냉기가 굽은 등에 슬픔을 출렁거리게 한다
그가 지고 가는 밑 빠진 계절 흐린 하늘 지고 가면 고갯길 어디에서 누구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무심한 눈망울들, 세상은 개망초 흔들리는 망초꽃들
그는 바닥이 되어 간다 밑 빠진 독에 노래를 가득 채울 때까지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흥얼거리며.....
남자는 이 바닥을 흐드러진 꽃이라고 부른다
*법원이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서 서면을 보내는 형식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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