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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온윤 시인 / 날개뼈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

조온윤 시인 / 날개뼈

 

 

네가 길바닥에 웅크려 앉아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돌볼 때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

 

태어나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 위처럼

 

녹은 밀탑을 뚝뚝 흘리며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

 

 


 

 

조온윤 시인 /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조온윤 시인 / 귤

 

 

귤이 먹고 싶어요, 말하면 그는

투명한 귤 한알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손집게로 껍질을 벗기는 마임을 합니다

한알을 모두 벗기고 나면 반쪽을 뚝 떼어

자, 귤이란다. 능청스레 손을 내밀죠

 

어쩌겠어요? 속으로는 실망하고 말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등분된 귤을 받아 드는 시늉을 합니다

없는 귤을 먹으며 아, 맛있다. 말할 줄도 아는

나는 그렇게 순진한 바보는 아닙니다

굶주린 모두를 고작 한덩이 빵만으로 흡족하게 하였다는

허풍선은 믿지 않아요

 

그런데 틀림없이 내가 혼자서만 골똘하던 어느 날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나의 물음에

보이지 않는 깨달음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진짜 귤의 유일함

 

한알의 귤에서 열개의 귤 조각을

메마른 입술처럼 얇은 표피를 벗기고 다시

수많은 알갱이를 발견하는 건

귤을 쥔 자의 마음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것은

칼을 들이밀지 않고도 부드럽게 쪼개지는 것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다섯으로

혹은 손가락이 부족할 만큼으로도 나뉘는 것

 

한알의 귤에서 몇 사람의 몫을

발견할 수 있느냐는 오롯이

귤을 쥔 자의 마음이라고요

 

하루 몽상을 다 마치고 그림자를 끌며 가는 귀갓길에는

배고픈 저녁이 이미 절반쯤 삼켜버린 해를

손에 꼭 쥐는 시늉을 합니다

시간은 아직 내게

반쪽이나 건네주는 구나, 홀로 중얼거리면서요

주황색을 너무 많이 만진 사람처럼

손가락 끝이 누렇게 물들겠죠

 

천만에, 나는 만져지지 않는 귤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내가 혼자이고

보이지 않는 이 외로움을 다정하게

건네받아줄 누군가가 필요하면

 

해와 까지와 그림자, 심지어는 여기에 없는

그에게라도 말을 걸며

오늘의 잔양을 나눠 갖는 이가 나만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릴 겁니다

 

-시집 <햇볕 쬐기>에서

 

 


 

 

조온윤 시인 / 무족영원

 

 

그 도마뱀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꼬리와 다리를 뚝뚝 떼어낸 뒤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무릎을 감싸고 넘어져 있는 내게

도마뱀이 다가와 물었다

넘어지는 기분은 어떠니?

 

넘어지기 전에는 다리가 부족한 도마뱀에게

넘어지는 기분을 설명해줄 수 없었다

도마뱀은 넘어지는 기분을

발목을 빼앗기듯 쓰러지는 그 기분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한시간 동안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쓸모없는 내 다리를

떼어버리겠다고

 

핸들을 잡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지나간다

자랑처럼

아이가 두 팔을 날개처럼 펴지 않게 될 때

 

달리기를 하자고

들뜬 걸음으로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네가 나무였을 때

 

나의 부족함이 너의 간절함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양손과 양발을 모두

똑바로 걸어가는 데 사용했다

그래도 얼마 못 가 다시 주저앉게 될 때

 

나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부족한 것과

무족한 것은

어떻게 다르냐고

 

도마뱀이 말했다

무족한 것은

넘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영원하겠지

하지만 넘어진 이들에게 다가가

내밀어볼 수 있는 손이 없다면

영원 따위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꺼내보지 않는

슬픔일 것 같다

 

몸뚱이만 남은 도마뱀의 몸이 내 다리를 휘감았다

냉혈동물의 육각형 피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무릎 위로

눈송이처럼 내리고 있었다

 

-시집 <햇볕 쬐기>에서

 

 


 

 

조온윤 시인 / 먼 곳

 

 

갈 수 없는 곳으로는 다만 편지를 쓰네

 

극락에 살고 있는 새들은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건 극락엘 다녀온 사람이 알려 준 걸까

너무 믿고 싶은 소문은 의심부터 들지

 

평일 오전이라서 거리가 텅 비어 있다

길바닥에 앉아 옥수수를 팔던 할머니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먼 곳에다 묻는 안부를 싣고 비행기는 날아가고

공중에서 쏟아지는 우편처럼

전단지들 휘날리고

지상낙원 최대 규모 오픈 이곳에서 행복을 찾으세요 그런 말들을

함부로 믿고 떠나 버리네

 

세상의 끝에는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는지

문지방을 넘어 발을 딛는 순간 문은 어느 쪽에서

닫히고 더는 열리지 않는지

 

사람들은 수평선을 향해 끊임없이 새를 날리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향기조차 실려 오지 않네

 

수상한 일이지

수평선 너머로 한 번 날아간 새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리워하지도 않는다는 걸

 

그만큼

그곳은 아름다운지

 

-시집 <햇볕 쬐기> 에서

 

 


 

 

조온윤 시인 / 날개뼈

 

 

네가 길바닥에 웅크려 앉아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볼 때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

태어나 한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 위처럼

녹은 밀랍을 뚝뚝 흘리며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

 

-『서울신문/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2022.10.14.

 

 


 

 

조온윤 시인 / 중후군

 

 

같은 공간에 사니까

자꾸 숨이 섞이잖아

 

이 방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의자가 놀라 넘어지지 않도록

의자를 딛고 있는 의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 위에서

빛이 새는 천장을 고치는 이가 내려오지 않도록

 

스위치를 내린 뒷모습에서 소리가 들려도

못들은 체한다

 

서로가 입댄 컵으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 우리

침이 섞이니까

싸우지 않는다

피가 섞일까봐

 

그거 알아?

너랑 있으면 창문 밖만 상상하게 돼

 

숨이 자꾸섞이니까

어떻게 아무 말도 않고 나란히 앉아 있으면

너는 열리지 않는 밀실 같으니까

 

희박해지는 공기를 나눠 마시면서

우리는 서로의 등에 기대어 심장과 심장이 나누는 타전을

훔쳐 읽는다

 

우리가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숨을 참는다

 

가라앉는다

 

이름이 섞일까봐

우리는 부르지 않는다

 

-시집 <햇볕기>에서

 

 


 

 

조온윤 시인 / 컴컴한 극장에 내가 앉아있는 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앞사람 때문에

앞사람은 앉은키가 크고

무심한 뒤통수가 내가 아는 사람을

닮은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뒷모습이 쓸쓸해지고 있다는 걸

앞은 모른다

 

어깨를 두드려서 뒤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웃으면서 고개를 조금 비켜줄지도 몰라

아직 펼치지 않은 시간의 뒷면으로도 빛이 스밀지 몰라

맑은 눈으로 어둠에 파묻힌 검은 활자를 씻어줄지도

내가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앉아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긴 의자라면

우리에겐 더 이상 컴컴한 배후가 없고

모든 건 명확해질까

나란히 앉아 좌우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다정해질 수 있을까

 

그건 너무 순해빠진 생각일까

세상에는 뒷모습을 닮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걸

기억해낸다

정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누가 나를 미워하는지…

조바심에 손톱을 물어뜯으면서도

다시 원래대로 자랄 거라 믿는

낙천적인 버릇도 고쳐야 한다고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앉아있는 게 세상에 하나뿐인 기다란 의자이고

이곳이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극장이라면

우리는 옆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의자의 끝에서 끝으로 전달되는 쪽지를

함께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

 

누가 이야길랑 잊은 채 노곤한 잠 속에 빠져있는지

누가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 눈물을 흘리고

 

 


 

조온윤(曺溫潤) 시인

1993년 광주에서 출생.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햇빛 쬐기>. 문학 동인 〈공통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