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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시인 / 산성비 -문명에 갇혀
요즘 빗소리는 둔탁합니다 비는 하늘이 오염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숨을 못 쉬고 얼른 땅에 떨어져 버리고 싶은 거지요 쉽게 말하자면 물방울들이 마구 자살해 버리는 것이라 할까요 비가 제 수명대로 하늘에서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판에 땅에 것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땅에 것들이야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빗물은 흘러 송사리가 살지 못한 개울로 가서 묻히고 그 개울에 삽을 씻는 노인의 수심은 들판을 바라봅니다.
김상현 시인 / 혀에 관한 반성문
나는 오늘 당신은 만났다 만나기 위해 내가 갔다 나의 이기는 당신의 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것은 당신의 혀였다 당신의 혀에 화상을 입고 돌아와서 나는 귀를 매만져 보았다 그동안 내 귀를 원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누군가를 위해 이제는 귀를 비워두기로 한다.
-시집 <바람의 등뼈> 2022 문학수첩
김상현 시인 / 소회
젊음에게서 겨우 도망쳐 나왔네 도망쳐 나오느라 눈도 흐려지고 이빨도 망가졌지만 나는 안도하네 너무 멀리까지 도망쳐 나온 건지 발치에 꽃을 던지던 자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고 나 역시 부재한 이들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네 결코 뒤돌아보거나 뒤돌아가고 싶지 않은 욕정이 구렁이처럼 도사리고 있던 젊음, 육체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는 멀리까지 와서야 산등성이에 휘날리는 늦가을 억새와 높새바람에 쓰러지는 저녁노을의 신비로움을 보게 되었네 나는 억새꽃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탈출의 기쁨에 찬 노래를 흥얼대고 있네 남은 시간은 틈틈이 아직 젊은 벗들에게 곡진하게 편지를 써 시큰거리는 관절염처럼 몸으로 느끼는 자유를 알리고 싶네.
-시집 『바람의 등뼈』 2022.
김상현 시인 / 바람의 등뼈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별이 되었지만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바람이 되셨다
모두 하늘을 우러르며 소원을 빌 때에도 허리 굽은 우리 할머니는 땅에 소원을 빌었다
하늘에는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라며 뻐꾹새 울면 참깨 파종하고 살구꽃 필 때 수박씨 심으며 사람은 흙을 파먹고 사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허리 굽은 우리 할머니는 하늘의 별보다 흙 비집고 나오는 굼벵이와 더 친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뻐꾹새 울자 바람이 된 우리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참깨 밭 언저리를 서성이시다 돌아가셨는지 참깨 깻단이 넘어져 있구나
김상현 시인 / 아구 -식중단상(食中斷想)
나 일찍이 바다에 있을 때 입 크다고 놀림 받았지만 지상에 나와보니 입 큰 동물 너무 많네 그중에 사랑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보다는 허튼 말, 흘리는 말, 간사한 말이 더 많은 사람의 입이 참으로 크네 입으로 살리고 입으로 죽이는 사람의 입이 참으로 크네.
김상현 시인 / 전라선은 간다
전라선 기차바퀴 구르는 소리 진개 빈들 지날 땐 봉준봉준 이름 맺히게 부르며 질풍처럼 내달리고 무등뫼 휘돌아 갈재고개 오를 땐 덕령덕령 이름 숨차게 부르며 깃발처럼 오르다가 남강 구비 돌아갈 땐 아 논개논개 그 이름을 꽃잎 즈려밟듯한다
오늘도 전라선은 간다 기적 한 번 울려 풀잎 일으켜 세우고 기적 한 번 더 울려 꽃망울 터트리며 임이 사력을 다해 지키던 땅 전라도 황토 들판을 질러 전라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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