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영서 시인 / 남해에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

 고영서 시인 / 남해에서

 

 

통통배가 통통거리며

다시, 바다를 가른다

시퍼런 심장이 포말로 부서지며 점 점 점

결박되어지는 포구에

배들은 시시때때로 오라를 풀고

 

제 능선을 꺾으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한 쌍의 달아오른 울음 위로

만삭의 달이 뜬다

 

정박한 빈 배에 가만히 앉아

가뭇없는 네 생각만으로도 출렁거려서

짜 내어도 짜 내어도 푸른 물이 뚜욱, 뚝

 

내 그리움의 빛깔은

지치지도 않고

 

 


 

 

고영서 시인 / 단 한권의 생

 

 

달 비친 사창사창에 한이 많아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라나*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처 이옥봉은

온몸에 시를 감고 죽은 여인

여염의 아낙이 되어

지아비 얼굴을 깍아내리는 일 따위,

시 따위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천형을 앓다

산지기의 누명을 벗기는

시 한 수로 내쳐졌으니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돌다

겹겹의 종이로 떠올랐으니

하나같이 빼어난 구절양장구절양장이

명나라 원로대신의 서가에

그렇게나 소중히도 꽂혀 있었던 것

 

시퍼런 언어의 작두를 타다

뼈째 썰리는 고통으로

내림굿이 되는 시

씻김굿이 되는 시

 

 


 

 

고영서 시인 / 다음 생生

 

 

분꽃 진자리

 

연두색 꽃받침 위에

마침표가 하나씩

 

쭈글쭈글한 손이 그걸

거두어 갑니다

 

팔랑팔랑

나비가 앞장서고요

 

 


 

 

고영서 시인 / 목백일홍, 그 꽃잎을

 

 

 얼마를 견뎌야

 저 타오름의 경지에 닿나

 이녁 몸피는 화상투성이 맨들맨들 맨발로 올라 낙상하기 좋아라 발등에 손가락이라도 닿을라치면 간지러운 발작에 하르르 각혈하는 그대가 보 인다 어느 먼 옛날 목숨 같은 사랑을 떠나보내고 이 꽃그늘 아래 목 놓아 운 적 있었나 기침의 흔적들로 낭자한 연못 바람도 뜨거운 삼복三伏에 피고 지기를

 

 아득해라, 한 움큼의 꽃잎을 쓸어

 가슴에 한 사람을 들여앉히는 일은

 

 


 

 

고영서 시인 / 母情

 

 

망월동 행불자 묘 앞에

손금순 할매

열네 살 아들 면회가 길다

"늘 저 얼굴이여

살았으면 뛸 텐데

뛰어봐라 한번

무량한 놈

엄마 가슴에 못질하고 간 놈"

사진 속 깊이 빨려들었다가

한나절을 실컷 울다가

툭툭 털고 일어선다

"네 뼈는 내 손으로

묻어야지 암"

 

 


 

 

고영서 시인 / 단 한권의 생

 

 

달 비친 사창사창에 한이 많아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라나*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처 이옥봉은

온몸에 시를 감고 죽은 여인

여염의 아낙이 되어

지아비 얼굴을 깍아내리는 일 따위,

시 따위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천형을 앓다

산지기의 누명을 벗기는

시 한 수로 내쳐졌으니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돌다

겹겹의 종이로 떠올랐으니

하나같이 빼어난 구절양장구절양장이

명나라 원로대신의 서가에

그렇게나 소중히도 꽂혀 있었던 것

 

시퍼런 언어의 작두를 타다

뼈째 썰리는 고통으로

내림굿이 되는 시

씻김굿이 되는 시

 

-시집 <우는화살>에서

 

 


 

고영서 시인

1969년 전남 장성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기린 울음』 『우는 화살』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 출간. 현재 광주전남작가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