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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라 시인 / 관성
크레파스로 길게 사선을 그려요 당신은 열차라는 사실을 모르고 올라탔겠죠
우리는 마주보며 멀어지고 있어요 순방향과 역방향 의자에 앉아
창문 밖 풍경이 흔들리며 녹고 있네요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커피 속 얼음처럼
크레바스를 크레파스로 읽는 것은 실금이 간 유리 잔을 드는 일
밍밍한 커피가 손에 들려 있어요
안도는 방심을 방심은 사고를
공장 벽의 슬로건이 빠르게 스쳐갑니다
낯선 승객들 사이에서 고장 난 보일러와 현관문 열쇠에 관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림자를 다른 방향으로 눕히고 나는 오른 쪽을 당신은 왼 쪽을 쳐다봅니다
굉음을 울리며 열차는 쉬지 않고 달려가는데 우리의 무릎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도착지가 지루하고도 멉니다만 목적지가 같다는 데 서로는 안심합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황사라 시인 / 활어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황사라 시인 / 암 병동
암 병동 1
병원 복도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담당 의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 달밖에 살 수 없는데, 집에 어른 안 계시니?”
동생들은 엄마 침대 옆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
암 병동 2
남자는 매일 아내를 의지하여 병원 복도를 운동했다
아내는 “소용없는 일이야.”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탕비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거렸다
*
암병동 3
배시시 웃던 청년이 있었다 엄마에게 떼를 부리곤 했다
얼굴이 하얗고 눈동자가 맑았다 미대를 다니던 중이라고 했다
“항암제가 너무 독해요
*
암병동 4
암 병동 1, 2, 3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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