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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사라 시인 / 관성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2.

황사라 시인 / 관성

 

 

크레파스로 길게 사선을 그려요

당신은 열차라는 사실을 모르고 올라탔겠죠

 

우리는 마주보며 멀어지고 있어요

순방향과 역방향 의자에 앉아

 

창문 밖 풍경이 흔들리며 녹고 있네요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커피 속 얼음처럼

 

크레바스를 크레파스로 읽는 것은

실금이 간 유리 잔을 드는 일

 

밍밍한 커피가 손에 들려 있어요

 

안도는 방심을

방심은 사고를

 

공장 벽의 슬로건이 빠르게 스쳐갑니다

 

낯선 승객들 사이에서

고장 난 보일러와 현관문 열쇠에 관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림자를 다른 방향으로 눕히고

나는 오른 쪽을 당신은 왼 쪽을 쳐다봅니다

 

굉음을 울리며 열차는 쉬지 않고 달려가는데

우리의 무릎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습니다

 

도착지가 지루하고도 멉니다만

목적지가 같다는 데 서로는 안심합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황사라 시인 / 활어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황사라 시인 / 암 병동

 

 

암 병동 1

 

병원 복도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담당 의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 달밖에 살 수 없는데,

집에 어른 안 계시니?”

 

동생들은

엄마 침대 옆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

 

암 병동 2

 

남자는 매일 아내를 의지하여

병원 복도를 운동했다

 

아내는

“소용없는 일이야.”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탕비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거렸다

 

*

 

암병동 3

 

배시시 웃던 청년이 있었다

엄마에게 떼를 부리곤 했다

 

얼굴이 하얗고 눈동자가 맑았다

미대를 다니던 중이라고 했다

 

“항암제가 너무 독해요

 

*

 

암병동 4

 

암 병동 1, 2, 3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죽었다

 

 


 

황사라 시인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