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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솔 시인 / 그때 거기
오래전 산의 날개 안에서 마음 출렁이던 때 있었습니다 욕심 없이 살겠다는 자만 속에 고립된 생활을 즐기던 그때 생각해 보니 미안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나를 품어준 숲속에 작은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고 떠나온 것도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 하나둘 먼저 떠나보낸 것도 모두 아프고 미안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하얗게 물안개오르던 개울물 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은 어느새 헉, 헉 그 소리를 따라 달리고 가슴은 뻐근해져 하늘을 움켜집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그곳을 앓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려워집니다
-시집 <템페스트>에서
신혜솔 시인 / 적반하장
섬초롱 꽃망울이 벙긋, 벌어졌다
건드리면 뎅! 종소리가 날 것만 같아 꽃봉오리에 살짝 손을 대어본다
톡! 장미 가시에 찔린 것보다 더 소름 돋는 통증 손 끝에 감각이 없다
꽃과 연애하던 그놈이 내뱉은 한 마디만 얼얼하게 울린다
내 것에 손대지 마!
꽃을 키운 건 나였다고 따지지도 못했다
-시집 <템페스트>에서
신혜솔 시인 / 3일부터 마지막 산책
구십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산책을 마치고 흡연실에 앉아 있다 사진으로 보았던 늙은 간디의 얼굴도 보인다
하얀 연기 속 침묵은 길고 땅으로 꺼진 눈동자가 기억의 동산을 더듬는다 어디까지 거슬러 오르는 걸까 타들어 가는 담배를 쥐고 있는 손가락 연기는 가라앉고 재는 떨구지 않아 아슬아슬한 거기까지 천천히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는 눈과 마주치자 여기가 어디야? 요양 병원이잖아요 다시 눈을 내려 땅바닥을 아니 그보다 더 깊숙한 곳을 더듬거리는 아버지
담배 한 개비 태우려 산책 나온 내 아버지는 생각에 잠긴 철학자다 아니 그냥 백지처럼 깨끗하고 맑은 아이다 굴곡진 한 세상이 다 빠져나간 듯 고독한 노인의 과거를 거둔 흡연실
아버지! 담뱃재 털어야지 희미한 눈동자가 떨고 있다 휠체어가 흔들린다 담배 한 개비의 재보다 더 가벼워 보이는 아버지의 이마와 팔 시월의 바람이 도닥여도 재는 털지 않는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숨 쉬고 있는 희미한 생명의 불빛
신혜솔 시인 / 푸념
검은 바람과 함께 죽은 엄마소리가 들린다 살림밑천 첫딸도 좋지만 아까운년,아들이나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고 삼각산을 돌아 바람으로 왔다가 한숨 내리쉬고 돌아간다
밤 하늘엔 애닯은 기도소리만 울리고 잠시 숨이 멎는듯 가슴이 아프다 얼굴도 모르는 어린고모의 모습이 다람쥐 등을 타고 스쳐간다 멀뚱히 쳐다보는 늙은 조카의 수심 찬 얼굴 살아 생전 당신모습이 있을까 어루 만진다
어둠속 나무들이 흔들리며 삼십 몇년 전 첫애를 낳다가 하늘로 간 그의 누나가 다가왔다 내가 부럽다고 그래서 밉다고 나를 시기하는 그 목소리 하나도 밉지 않은건 마음이 맑아진 후 바람소리를 들어서였나 보다
산은 새벽 두시에 졸고 나는 그 시간에 깨었다. 나를 깨우고 간 영혼들의 숨소리가 나즉히 귓가에 맴돈다
'네가 원하는대로 해'라는 고마운 노래 소리가 불면의 밤을 다독이며 살금살금 숲을 빠져 나간다
어둠속에 메아리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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