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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숨 시인 / 우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4.

이숨 시인 / 우산

 

 

척추를 세우고 뼈들이 기지개를 켠다

 

허공에 집 한 채 세워지면

비의 쉼터

떨어지기 전 충격을 흡수하는 평화주의자

 

연잎의 물방울처럼 흘러내려

우산살 끝에 이슬처럼 매달려

발등에 떨어진다

 

한 번의 부딪힘과 두 번의 만남으로

섞이는 관계는 흠뻑 젖는다

너와 내가 섞여 한 기둥 아래 있다

 

우산살이 부러지고 뒤집혀도

축대처럼 서 있는 너의 뒷심에

뼈와 살은 등과 안을 지킨다  

 

-시집《 구름 아나키스트 》에서

 

 


 

 

이숨 시인 / 민들레 기침

 

 

순백의 부활을 꿈꾸는 그녀의

뒷덜미가 뻐근하다

한길을 쫓아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걸었던 타자의 길

이제는 나의 뒤통수가

누군가에게 꿈이 되는 날이 시작되었다

순백의 머리카락 속에

별빛의 언어들이 숨쉬는 공간이 비좁아

성숙한 집 한 채씩 들고

멀리 날아가서 꿈으로 살아가리

허리가 휜 긴 대롱에서 배운

땅의 지혜와

하늘이 안겨준 포옹의 특별한 신의 한 수까지

깨 털듯 탈탈 털어내리

배움은 나누는 것이라고

여행 전문가 잠자리의 명언에

나도 동참하리

하나에서 시작된 노란 꿈이

흰 머리카락 덤불 속에 수많은 별의 꿈으로

폭풍 성장하였듯이

 

-시집《 구름 아나키스트 》에서

 


 

이숨 시인 / 샐러드볼

 

 

구역 된 곳에서 야채들이 골똘한다

토마토를 반으로 자르면 생각이 나뉘고

상추는 텃밭의 생각을 갈기갈기 찢는다

오독오독 씹힐 것 같은 옥수수의 심연

채 썬 오이는 물이 많은 여름을 발설한다 섞인다

 

샐러드라는 이름을 갖는다

토마토를 먹으면 새의 참견과 구름의 역설이 씹히고

상추를 물어뜯으면 애벌레의 유연성과 흙의 비밀까지 퍼진다

오이가 아삭아삭 입안에서 리듬을 타며

명랑한 햇살같이 과거를 지우려 하는데

나는 왜 눈물이 자꾸 나는 걸까

 

나와 당신이 아무리 섞여도

당신의 것과 나의 것으로 하는 걸까

 

이번엔 토마토의 후회와 상추의 고독과

오이의 허무를 넣고 섞는다

그런데도 상상의 맛이 끝없이 쓰다

 

 


 

 

이숨 시인 / 물의 얼굴

 

 

바람이 불 때

물이 흔들려주었을 뿐인데

우리는 바람이 물을 건드렸다고 하지

출렁출렁 물이 대답하고

바람은 제 발자국을 물 위에 남기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바람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어

물에 말을 걸고 나무에 말을 붙이지

회오리바람으로

또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물은 순하지만 수시로 표정이 달라지지

잔잔한 얼굴은 바람의 격한 감정에

소용돌이가 되고 물과 바람이 합쳐지면

집채만 한 해일이 되기도 해

물의 투명한 얼굴도 흙탕물이 되기도 하지

물의 얼굴을 만지면

바람의 크고 작은 감정이 들어있어

이것은 물이 바람을 거부하지 못한 때문이지

 

바람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물은 정체되고

썩은 웅덩이가 늘어날 거야

알고 보면 물은 바람을 이용하는 이기적 유전자

물은 바람의 손을 잡고 살아남는 거지

 

 


 

 

이숨 시인 / 풍장

 

 

덕을 쌓기에는 두 개의 입을 끈으로 연결해

중심을 잡는 게 안성맞춤이다

덕에 몸을 기대며

바람이 시원하게 꼬리를 흔든다

 

겨우내 시린 몸을 공중에 맡겨두고

바다에서 할 말을

산중에선 뻐끔거리지 않아도 되고

비어있는 속에 무엇을 넣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평생 쉬지 않고 꼬리로 휘젓던 길

이제 긴 휴식이다

 

덕의 근원은 입의 중용,

꼭 다문 입술로

절연하겠다는 것은 무례하다

무엇이든지 다 받아 줄 것 같은 입 모양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듣는 것에 관심이 없던 바다를 버리고

덕장에서 다시 태어난다

 

진부령 고개에

바람이 하얗게 쏟아진다

바람의 말을 아가미가 아닌 입으로 듣는다

 

 


 

 

이숨 시인 / 자주광대나물꽃

 

 

해름참에

초록 대문에 기대어 집 나간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아야, 언능 들어가서 밥 먹자

김치만 먹던 일주일

초식에서 육식의 경계에 선 저녁

쇠고기 맛에 빠진 나를 지켜보는 낙타의 눈이

고기를 내 앞으로 민다

고기는 소화가 안 된다며

푸성귀만 골라서 낙타처럼 씹는 어머니

밥상 아래 밥그릇을 놓고 먹던 습관은

큰 상으로 바꾸어도

이것이 편하다고 고집한다

버스 정류장까지 보따리를 이고 뒤따라오며

바지락은 해감 했으니 그냥 국 끓이고

칠게장은 냉장고 넣어라

친구랑 싸우지 말고 지내라

보따리를 태운 버스는 항구에 이르고

연분홍 치마저고리에

목장갑을 낀 어머니는 벤치에서 담배를 피운다

가래가 섞인 기침의 담배 냄새는

졸업식 꽃다발에도 배어있다

상석에 담배 한 대 놓아드리고

갯벌에서 꼬막을 잡는

어머니 몸에서 자주광대나물꽃 냄새가 난다

 

 


 

이숨 시인

1967년 전남 장흥 출생. 본명: 이영숙(李永淑). 백석대 기독교전문대학원 상담학 박사. 경희사이버대학원 미디어문창과. 2018년《착각의 시학》으로 등단. 시집 『구름 아나키스트』. 제7회 등대문학상 수상. 제2회 詩끌리오 작품상 수상. 현재 시치료 전문가. 은행나무숲상담소 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