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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형국 시인 / 균형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4.

서형국 시인 / 균형

 

 

이것은 오래 누웠던 노인이 허리를 세우고 운동장을 잠시 걸었던 이야기다

 

당연한 일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당연하다고 믿는 일을 떠올린다

 

가령,

근심이 무거우면 사소한 일도 기쁨이 되는 일

정물로 앉혀놓은 맷돌 밑으로

풀 한 포기 솟는 일

 

그러니 무게는

짓눌린 쪽에서 합의한 신체포기 각서와

무엇이 다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때마다

발목이 자랐다

 

나는 지루할 정도로 웃고 싶은데

그러기에 충분한 입을 가졌는데

 

터무니없이 입이 커지면

누군가는 반드시 발목을 잡았고

때론 그것이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부당한 일을 떠올린다

다시 말해 부당하다고 믿는 일을 떠올린다

 

가령,

옳지 못한 일도 절실해지면 필요한 일이 된다고 믿는 일

정물로 앉혀놓은 맷돌 밑으로 풀 한 포기 솟은 일로

감히 내가 시를 쓰는 일

이것은 늙은 남자가 늙어버릴 남자를 무동 태워 40년 전 흑백사진 속으로 질주했던 그 오 분의 이야기다

 

벌로 입을 받은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형국 시인 / 다정한 균열

 

 

온통 관심 밖 이야기로

술렁이는 술집

 

아이가 넷인 은행원의 푸념과

아이가 없어 이혼했다는 보험설계사의

한숨을 섞어 바텐더는

셰이커를 흔든다

 

관심 밖의 일이지만, 나는 분명

이곳에 있다

 

유행 지난 음악과 구슬픈 사연들이

웅웅 거리는 홀 구석자리에서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는 유령,

우리는 대화가 통할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 나는 가벼워져야지

마음도 비우고 더 가볍게, 무심하게

흔들려야지

 

당신도 이 낯선 변두리에서

온더락 잔에 담긴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입안에서 바위처럼 굳어버린 내 혀는

내 기억에만 관심이 없습니다

 

술이 금 간 어금니 사이로 다 새나가는 동안

마음을 비운 사람은 작은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다정한 사이인가

믿음직한 관계인가

 

오래전 애인은

선장을 꿈꾸던 내가 뱃멀미를 못 견뎌

부둣가 하역원으로 살았다는 말에서

파래 같은 실금을 보았다고 했다

 


 

서형국 시인 / 노엘

 

 

 그해 겨울은 납작 엎드려 왔지만 사람들은 겨울을 밟고 연탄재를 뿌리며 오직 캐럴을 부르는데 열중했다

 

 기쁘다 거룩하다 그래서 운다는 사람들이 살이 문드러지는 병을 거두며 키운 돼지를 마을 십자가에 바쳤고 언 땅에서 거둔 시금치가 눈의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밤이 소유한 모든 빛을 동원해 녹슨 지붕을 밝혀주길 기도했다

 

 낮은 곳으로 가자

 아이야

 

 너도 누군가의 소원이었으니

 세상 모든 소원은 이미 누군가 이루었단다

 

 기도는 이런 것이지

 

 기울어 흉물이 된 누각에 올라 자신이 만든 폐허를 내려다보며 당신의 염원을 내 발밑에 두게 해 달라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세상에 몰딩을 씌워 두 편 쪽방에 액자로 걸 수 있게 해 달라고

 

 아이야

 

 지금도 남산공원에는 자신의 몇 번째 계단이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섬을 가졌는지 모르는 전망대가 다 탄 기도처럼 녹아 있단다 그러니 아이야

 

 낮음을 노래하자

 바짝 숙인 채 덮쳐 오는 저 파랑주의보를

 

 그들은 혀를 세운 자의 기도는

 듣지 못한단다

 

-『다층』 2022-가을(96)호 수록作

 

 


 

 

서형국 시인 / 서양식 접대

 

 

누구를 찔러본 적 없어서

 

칼을 쥐여주는 식당을 찾았다

 

자세히 들어야

바늘로 철문을 긁는 소리와 똑같은

바이올린 연주

 

귀는 꿈꾸는 순간에도

손톱 밑을 숨긴다

 

그러니 악보를 소화시키기 위해

음식을 차리는 식당은 왜

존재하지 않는가

 

눈이 돌아 토막 낸 소는

악장이 끝나는 틈을 타

플랜 B처럼 식탁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박살난 와인잔이 주르륵 흘러도

담담한 벽처럼

너는

 

한국말로 사랑한다는

러시아인 같고

 

나는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제물로 입양한

동양인 같구나

 

체온 보다 낮은 온도에서 달궈진

테이블 위로

 

속이 보이지 않는 디저트만

 

남긴 채

 

사람을 치워버리는

웨이터

 

시럽을 엎었다는

생각

 

 


 

 

서형국 시인 / 등

 

 

이름을 가진 모든 것들이 무아의 세계를 뚫고

문명에 꽂혔다. 봄

 

빛이 대기를 뚫고 대지를 찔렀고

계절은 계절을 뚫고 나무를 찔렀다. 여름

 

돌아갈 길을 완벽히 지운 채

파이지 않는 비석을 찌르던 비는 노래가 되어

회귀 중인 수많은 이별을 찔렀다. 가을

 

그러니, 겨울

텅 빈 원고지처럼 황량한 시간을 끌고서

너는 무엇을 뚫고 와

내 앞에 섰는가

 

내게로 걸어온 길을 낱낱이

기억하는 사람아

 

망막에 차오른 월광으로

뚫리지 않는 내 미래를

죽어라 파내던 사람

 

그날 작렬한 달빛을/ 한순간도 막아내지 못한 안경을 가지런히 접어두고

찔린 듯 아픈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돌아갈 길을 완벽히 지운

등이 있었다

 

 


 

 

서형국 시인 / 친절한 권태씨

 

 

내 꽃을 탐하는 나비를 띄우고 미동 없이 시선을 따라 붙인다

 

구걸하지 않았으므로 털어 낼 질투가 없는 날개

 

무서웠습니까

 

팔랑

 

출구가 입구를 견디는 동안 혼자서는 움찔도 못 하는 것들

반쯤 비운 양주병

늘어진 카세트테이프

방문에 목을 맨 헝겊 인형에게 내어준 하루

 

꽃이 오래 뻣뻣하지 못한 건 꽃이 아니라서다

나는 나비가 아닌데 나비라 죽지가 뻣뻣하다

 

인내가 없어 무르익자 오감을 접고 자살하는 익숙

 

출구는 저쪽입니다

 

팔랑

 

대략 이러한 내막이므로 일면식 있는 불안을 공손히 털어내고

나는

이 친절한 무료[無聊]를 기사화한다

 

 


 

서형국 시인

1973년 경남 창원 출생. 2018년 월간《모던포엠》 최우수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월간 『모던포엠』 사무국장. 全人文學 회원. 시나무 동인. 문학동인 volume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