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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 시인 / 수인선
기우뚱 내 마흔 같다
보내고 싶지 않던 젊은 날 입술 한 번 훔치지 못한 그 여름 같다
그리움이란 아득한 날 창문을 두고 우리 서로 보내는 수화(手話) 같은 것
박재화 시인 / 부겐베리아, 갈릴리의
건기의 끝 이른 비가 오시네 꿈결인 듯 설렘인 듯 비가 오시네 그 빗방울 부겐베리아*적시네 때맞춰 호수를 건너오는 바람 달고 시원하네 덧없는 시름 적막조차 겨운 날 돌집 사이 인간의 마을마다 깊은 사연 잠들고 깃발이나 외침 아닌 그윽한 힘이 빈 들을 적시네 그 아득함 가운데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건너가네 다가가서 따뜻하게 감싸네 깊디깊은 눈길이 부겐베리아 향기 새로 피워내네 그 꽃잎 흔들리는 소리 가득한 저녁에.
*갈릴리호수 주변 여러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관목灌木.우리나라에서는‘종이꽃’으로도 불리며, 꽃의 빛깔은 강렬하나 향기는 거의 없음. 꽃말은 ‘정열’.
박재화 시인 / 낙타
내남루한 어제를 그대에게 맡기고 오늘은 떠나려 하느니
떠날 수밖에 없어 쓰러지는 일 있어도 차라리 떠날 수밖에 없어 외로운 깃발 올리느니
지나온 길 묻지 말고 그대여 이제는 도리어 황홀한 불안 나 홀로 맛보게 하라
넝마 같은 날들 떨구고 창백했던 젊음 떨구고 비로소 뜨거이 마주선 무한無限 절대絶對.
박재화 시인 / 에스앤에스SNS 소고小考
블로그 없으면 페북 트위터 모르면 원시인이란다 원시인? 온몸으로 바람과 달빛 받아들이고 반짝이는 강물의 오래 빛나는 흐름 알았던 그 원시인? 서로를 운명처럼 엮고 믿었던 그 원시인?
시끄럽되 똑같은 SNS가 감히 어딜…? 그러면서 공허한 SNS가 감히 누굴…?
박재화 시인 / 사막의 기도 -광야시편 10
인간이 탈진한 곳에서 사막도 탈진한다 사막이 탈진한 곳에서 신도 탈진한 듯...
적막만이 넘실대는 곳을 오체투지로 걷는다
생각 끊기고 시간도 끊길 때쯤 어둠보다 짙은 고요가 찾아온다
별똥별 저쪽으로 스러지는 눈부신 순간 내 기도도 은하를 건넌다
순결을 잃고 빛갈을 잃고 블랙홀 근처에서 떠도는 미 무거운 지구의 한켠 내 기도가 은하를 건넌다
오, 나지막한 계시의 바깥에서 내 너무나 오욕을 사랑했음을 마니 방황과 더불어 살았음을....
-시집 <전갈의 노래>(리트피아, 2004년)
박재화 시인 / 깨달음의 깨달음
걸핏하면 무얼 깨달았다는 사람들 두렵다 무언가 알아냈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 무섭다 나는 깨달은 적이 없는데 어떡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닫기로 말하면 대체 무엇을 깨닫지? 이것인 듯하다가 저것인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깨달음까진 몰라도 바람 흘러가는 쪽이나 좀 알았으면… 유난히 긴 밤 잠 못 들면서도 깨달음은 아니 오고 깨달음은 왜 나만 비켜갈까 나의 깨달음은 대체 언제일까
깨달음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밤…
-시집 〈먼지가 아름답다〉에서
박재화 시인 / 어떤 영광은
북간도 어디 쓸쓸한 울 곁 거위와 닭들 날지 못한다 자바와 인도 밀림에 숨듯이 나타나는 공작 날지 못한다 아프리카 사막의 삼한 햇빛 속을 달리는 타조 날지 못한다 뉴질랜드의 반물빛 낯선 밤을 지키는 키위 날지 못한다 남극을 덥히는 황제펭귄과 아델리펭귄도 날지 못한다
날지 못하는 날개가 지닌 슬픈 힘! 구천 종 넘는 새들 가운데 그들만 천형을 받은 뜻은?
날지 못하는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라고 헛꽃 같은 사람들 목청 높일 때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고쳐주면서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며 예수는 오로지 하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라 하였다* (하늘은 빙충이 도사리를 통해서 영광 받는다?)
오늘은 서녘 하늘도 주이상스Jouissance에 잠긴다는 듯 쉬이 가라앉지 못한 채 피를 토하고 있다
*요한복음 9장 3절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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