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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두호 시인 / 학습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4.

신두호 시인 / 학습

 

 

오늘 우리가 배운 것은

벌이 춤을 춘다는 사실과

그것이 그의 언어라는 점이었습니다

 

몸의 움직임들이 말이 됩니다

이 작고 부지런한 동물의 몸짓이

그가 햇빛 속에서 익힌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꽃들과의 거리와

달라지는 태양의 자리와

그에 따라 변하는 꽃들의 위치를

 

온몸의 춤으로 알려줍니다

원을 그리거나 8의 모양으로 돌면서

아무런 낭비가 없는 언어를 가지고

 

집을 떠나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햇빛 속에서의 더없이 따스하고 우아한 비행을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차단되어 있는 당신을

 

당신은 차단되어 있고 그 안에서 숨 쉬는 우리를

 

 


 

 

신두호 시인 / 6/5

 

 

없는 장소에서 그가 나온다

문을 열거나 닫고서

암시도 시점도 없이

계단을 밟으며 내려온다

 

그를모르는 영혼들이 하나둘 스며나온다

바닥과 벽으로부터

샹들리에와 괘종의 기후로부터

 

흐린 초침에 붙들린 환영들이

올라갈 곳 없는 5층에서 수를 불린다

종이 울릴 때마다

 

창문 근처에 하나같이 모여들어

벌 한 마리가 머리를 들이미는 걸 보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아무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거라고

 

입구와 출구가 동일한 건물 안으로

눈과 비가 동시에 내린다

문과 벽들이 쉴 새 없이 전달된다

 

벽을 지나쳤을 때 그는 이미 입체가 아니었다

동작들은 거리를 나누고 가지를 흔들고

건물은 나머지 영혼들을 흘려보내고

 

그는 없는 장소로 되돌아간다

계단에 모인 푸른 불꽃들이 사라지며

쓰고 매캐한 냄새의 벽을 허물어내도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에서

 

 


 

 

신두호 시인 / 고양이 관념론

 

 

새하얀 고양이는 하얀이라는 속성을 기른다

하얗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닌 고양이는

네 발을 모으고 골몰하는 7월의 구름 11월의 열기구

쓰러지는 나무 곁에 아무도 없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숲

종적을 지우며 흩어지던 발걸음이 멈추고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전화기만 확신한다

거실의 형태와 색채는 차원을 먼지로 기록하지만

공간을 점유하려는 사물의 성질은 믿음의 영역

하얀이라는 속성이 빛의 털실 뭉치에서 새어 나온다

정오를 떠다니는 음모들은 식별되지 않을 만큼 가볍고

고양이 없는 그림자들에 대한 실마리는

해진 주머니에 있다 버려진 지팡이의 매끄러운 손등 위에도

늘어진 음성처럼 더디게 퍼지는 초침 속에서

희미한 벽들을 선동하며 어슬렁거리는 방목소리는 기억한 입술을 잊기 위해 건너오지만

꽃병과 꽃이 서로에게 무능한 감정이듯

어둠 속 검은 원뿔의 희미한 테두리들을 가진

나는 근사한 걸음걸이에 빠져든다*

곡면을 제도하듯 차오르는 감정들의 기하학

향기의 모양을 간직한 꽃잎이 실재에 유일한자신의 꽃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고양이는

아니다 피어오르는 향이 붉은 부채를 펼쳐 보이는 어디에도

하얗게 지워지는데 아무것도 아닌 숲

한데 모인 네 발을 감추는 꼬리가 남는다

네온사인 파자마 가스파초 계피향

정지한 해변을 물들이는 창백한 개념들도

사라지기 위해서만 골몰하는 과정이

그리는 붓에서 찾는 붓을 발견한다 백사장이

태양을 등진 고고학자의 입에 견고한 무덤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 없는 꼬리의 뼈가 막 드러나려는 순간에

 

*폴 발레리<시의 아마추어>에서

 

 


 

 

신두호 시인 / 과일주의자

 

 

오늘은 음식을 먹다 입안의 살을 씹었습니다

적어도 세번은 먹는 일을 중지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걸까요

 

반성을 반성하기 위해 거울을 봅니다

치약은 형언하기 힘든 감정으로 흘러나옵니다

이빨과 치아를 구분하는 일은 늘 막막하지만

매일밤의 양치질은

나라는 유물을 발굴할 수 있을까요

 

결국 떨어진 것만을 주워 먹기로 합니다

바닥에 대한 기나긴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포도가 떨어지길 기다렸습니다

조롱당하지 않기 위하여

 

배반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함부로 총알을 소비하고 자신에게는

빈 권총의 방아쇠를 여러번 당겨야 했던,

오 가여운 트래비스

과일주의는 신념이기보다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만

 

거울 속으로 누굴 초대할 수 있을까요

과일주의자에게도 식단표는 필요한데 말입니다

익은 열매들이

썩고 문드러져 떨어질 순간은 그럴싸합니다

입안을 헹굴 때마다 씹혔던 살이

저릿하게 아려옵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저는 바보였나봅니다

 

 


 

 

신두호 시인 / 연인들의 연인

 

 

구름의 이동을 기다리는 게 지겹다

과정이라는 말을 결국 이해하게 될까

형태 이전의 모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검은 강물 속을 거스른다

생략하기로 한 미래를 그리면서

 

우산이 접히면 느려질 시간을 떠올려

엇갈린 손을 마주 잡는 것보다

부딪힌 팔의 진동이 각자에게 한기가 될 때

개별적으로 스며들 물방울을 염려한다

 

정지된 허공이 목소리로 떨리듯

청동상이 녹슬고

끝나지 않는 조각의 공원에서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는

가로수 및 가로등

 

그들이 정한 순서가 구체적으로 실행된다

어깨의 각도에서 보폭의 조율에 이르기까지

육면체의 조각들을 어지럽게 뒤섞으며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거리를 빠져나온다

 

멀어지고 난 뒤의 광장을 이해하는 일처럼

마르지 않는 옷으로 기념하는 미래

시작되는 빗속에서 우산을 펼치면

 

서로를 감춰주던 장애물은 전부 제거되었지만

쏟아지는 구름 어디에서든

소리만을 흔적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신두호 시인 / 다가가는 행위

 

 

주머니에서는 늘 손을 목격한다

누구의 것도 아닌

손을 위해 걸어야 했다

안개 속의 사람들이 고립되던 무렵이었다

 

할 말을 잇지 못하고

시야의 모든 사물로부터 멀어졌다

이글거리는 물풀이

도시에 불어나던 게 기억의 전부였다

 

시간이 초침 단위로 뚝뚝 끊어지고

손을 쥘 줄 모르는 손가락들이

보폭 속으로 서서히 잊히고

 

방향이 모든 감각으로 나뉘어갔다

곳곳에서 바지와 양말이 수거되었다

점들을 옮기려고 이동하는 몸을 만났다

 

움직일 때마다 안개가 자욱해지지만

중빌할 수 없는 무게는 색채로 번지고 있었다

서로의 부재가 위태로울 때쯤

연막 속에서 네가 형성되었다

 

사물들을 선으로 이어주는 건 혼잣말일지도 모른다

숨을 쉬어보면

밤하늘의 깊은 곳으로 옮아가는 점들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물결

 

무리에 섞여드는 네가 나를 기억해냈다

구분할 수 없는 손가락들이 손에서 손으로

안개 속을 떠돌아다녔다

 

-시집 <사라지는 입을 위한 선언>에서

 

 


 

신두호 시인

1984년 광주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