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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선 시인 / 백목련
나뭇가지가 알을 낳았다 수백의 알이다 알을 가지 끝끝마다 자랑스레 들어올리고 있다 햇살은 알에서 토도로록 튀어오른다 사람의 눈길도 모여들어 알을 어루만진다 바람은 그 비단결로 휘감아 흐르고 어느 하나 품어주지 않는 게 없다 한눈 판 사이엔 듯 일제히 부화해 재재거리는 하얀 새떼 오는 봄 다 불러모아 일일이 머리에 깃털을 달아주고 있다 나무도 벌써 몇 번을 날아올랐으리라
백우선 시인 / 범부 신화
쑥을 다듬으며 아내는 단오절까지 캐서 맛있는 쑥국을 두고두고 먹자고 했다
저희가 지른 촛불을 광장에서 마구 쓸어버리며 세상을 정글로 몰아가는 어둠을 행해
눈을 부라리며, 손톱 발톱을 세우고 호시탐탐 으르렁거리는 나를 염려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꿈틀대는 내 수성을 잠재우려고 마늘장아찌에 쑥국을 날마다 먹일 속셈임이 틀림없었다
백우선 시인 / 네가 나를 훔치는 동안
네가 몰래 내 자리의 옆구리를 따고 네가 슬쩍 내 가방을 훔치는 동안 네가 내 돈,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수첩, 운전면허증 따위를 훔치는 동안 나는 새봄과 함께 있었는데 나는 봄싹, 봄꽃, 봄소리에 나를 잃고 있었을 뿐인데 그동안에 네가 내 가방을 훔친 것은 그동안에 네가 내 분신들을 훔친 것은 그동안의 나를 내게 보이려는 것이었을까 나도 무얼 훔치고 있었다는 나도 누군가의 땀, 휴식, 기쁨 따위를 훔치고 있었다는 나도 누군가의 목숨의 꽃잎 따위를 훔치고 있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와 나는 동업 중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더 큰 도둑이었던 것일까?
<동시> 백우선 시인 / 자벌레
공원에 앉아 있는데 자벌레가 가슴을 옆으로 아래로 잰다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깊은지 재나 보다
마음이 얼마나 공원처럼 쉴만한지 재나 보다
-동시집 <염소 뿔은 즐겁다>고래책방 2022
백우선 시인 / 통멸치
머리, 뼈, 똥빼고 멸치를 먹으려다가 덜 미안하게 통째로 먹었다
내몸에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온몸이 백우선 함께 있기를 빌었다
백우선 시인 / 어머니의 잡풀
어머니, 무덤의 풀이 무성하네요 잡풀의 키가 허리를 넘겨요 발로 젖혀 밟아도 다시 일어서고요 돌아가신 지 열다섯 해, 살과 뼈는 삭아도 저희 근심은 더 푸르게 자라나나요 꽃도 없이 풀들만 숲을 이뤘네요 한여름 빗발 후둑이는 해질 무렵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이 칼잎의 풀은 제 것이지요 이 가시넝쿨도 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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