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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하경 시인 / 일붕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5.

김하경 시인 / 일붕사*

 

 

토굴 문을 연다

움직이지 않은 석등과 가부좌 튼 불상이

소리 떠난 움막을 바라본 저녁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물러서는 달을 본다

어둠이 계속될 것 같은 예언

달팽이관 저 혼자 중얼거리고

점점 어두워진 빛을 찾는 기도

돌 틈 작은 우담바라 인드라망의 별꽃이 훤히 폈다

골짝골짝 밤이 진을 치러 올라오면

진화된 반달이 내일의 보름달로 떠오를 것이다

하늘과 땅을 소통한 바람 등짝이 오싹하고

반은 밤이고 밤은 낮인 지구 그림자가

한쪽은 허물어지고 한쪽은 늘어진 시간이

망설이다 돌아오는 빛을 알리듯 기도한 손끝 반짝 반사된다

석등 여전히 밝고

끝없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열 손가락

손톱 속에 상현달이 뜬다

막다른 지구를 돌아 내일로 거슬러온 기다림 하얗다

환생은 손끝에서 탄생된다

어둠을 밀어내고

반달이 차오른다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으며, 서기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 있다

 

 


 

 

김하경 시인 / 모바일 게임

 

 

덫을 빠져나간 흉터가 예리하다

바위에 앉아 모바일 게임 한다

날름날름 나뭇잎 바둑알처럼 탁탁 털어지고

반격과 공격에 대응한 수는

한 여자가 쌍꺼풀 수술을 한다

배밀이로 스윽 지나간 풀밭

뱀이 벗고 간 허물이 늘어져 있다

그림자를 덮어쓴 숨 막힌 여름

퇴화한 다리까지 줄줄 벗고 사라졌다

허물이 마른 시간 속으로 바람 불면

부실한 것들은 벗겨내야 한다

은행을 둘러 병원을 지나 마트 앞 삼거리

승부한 이름들이 이리저리 길을 뻗고

절개한 눈꺼풀 아물어지는 동안

비행한 햇빛 건들건들 지나간다

흰 돌과 검은 돌이 팽팽히 겨루던 한낮

없었던 길들은 빈번히 나타나고

있었던 길들이 때때로 사라지는 바둑판 위

갈래 길도 길이라고

지도에 없는 길 속의 길이 필사본처럼 놓였다

머리통부터 꼬리까지 상처 난 자리마다

신의 한 수를 둔다

새 길이 난다

 


 

김하경 시인 / 밀서

 

 

삽짝 밖 탱자나무 울타리는

탱자 꽃이 온종일 지고

0다리 노인이 강아지를 끌고 뒤뚱뒤뚱 지나간다

눈물처럼 무릎에 물이 차오르나보다

시간이 익어 하얗게 늙어가는 동안

정수리에 핀 꽃은 제 빛깔이 아니다

초저녁 석양은 하루의 마무리다

밀서를 쥐고 길 떠나는 노인

시들시들한 부종은 무덤 같다

방울소리 딸랑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

꼬리를 말아 올린 뒷다리가

말굽처럼 휘어졌다

노인의 무릎도 동그랗게 휘어져 있다

∩ 교집합 다리

목적지의 삶도 능선처럼 동그랗듯

시간의 흉터도 동그랗게 휜 다리를 끌고 잘름잘름 길을 간다.

퉁퉁 부은 무릎에 크락션 소리 들린다.

물찬 통증을 빼는 오늘

천자는 밀서를 뽑아낸다

수액을 흔들어 시간을 빨아낸 통증

다리는 이미 무릎이 아니다.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강아지

어제 만든 죽음의 골대 앞에서

생을 앓은 코너킥에 맞서 하늘을 보고 짖는다

퇴화중인 무릎 사이

반달이 뜬다.

 

 


 

 

김하경 시인 / 말들의 무덤

 

 

서서도 달리지 못한 말 누워야만 달릴 수 있는 것일까

제나라를 누비던 순마갱이 발견되었다

헛되지 않은 말들의 죽음

산둥반도의 갈비뼈 화석이 햇살 아래 반짝인다

줄지어 북으로 올라가는 철새들 날갯짓처럼

주인보다 먼저 달린 말들의 형체는 아직 당당하다

무덤 속 흰 뼈들이 자리 잡고 누운 저녁

주인과 머리를 맞대고 달린 제나라의 생존전략

전신을 지탱한 힘이 영토를 사육한 전략이다

순장 된 말의 뼈를 들여다본 갱

곤죽 된 말의 몸에서 줄무늬 갈비뼈가 보이고굽혀야만

멀리 뛰던 말들의 무릎 소리가 달그닥 거린다

둥근 표정 아래 할딱거리는 토종의 숨결

죽어서도 뛰는 얼굴로 누워있다

편차에 쇳물이 다 빠져 흙가루가 된 지금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주 발끈거렸던 말발굽 아래

말도 국경을 넘어가는 꿈을 키웠을까

할딱할딱 넓은 구릉지 절벽을 넘나들던 시간

편차를 잡던 군사들의 호패에 새긴 16살이 뚜렷하다

재갈 길을 오고 가던 하령두촌

어둠을 깔고 밤하늘을 스친 몇 필의 말은 누워서 달린다

U자형 말의 무덤 속

누워서 만주 벌판을 달리는 곳

사거리에 장군을 태운 말의 동상이 세워질 때

갈기의 장신구들은 햇살 아래 누웠다

무덤의 그림자가 말의 편차 따라

오늘을 달린다

 

 


 

 

김하경 시인 / 합죽선

 

 

박물관 벽면에

대오리살 수액이 한지 위로 배어나올 것 같은 대나무가 빗금처럼 말라있다

 

먹물번진 햇살 아래로 한걸음 물러 앉힌 반야를 남겨둔 공민왕

아버지 따라 궁궐로 들어간 고려인의 모습이다

 

늑골에 대나무 겉대가 툭툭 불거졌다

 

시첩 뒤를 살금살금 밟던 공민왕 숨소리

고려인 울음소리가 대통 속에서 들리고 쭉쭉 결을 편 합죽선이 둥글다

 

오므렸다 펼쳐진 합죽선, 빗금이 짙다

내 손바닥에도 빗금이 짙다

 

주먹 쥐었다 편 사이에 등줄기 따라 서늘함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보이는 가슴은 아리다

 

나는 남의 손바닥에 얼마나 많은 빗금을 쳐야 했던가

 

부채를 만든 문화생의 땀 젖은 손가락 끝을 보면

빗금 같은 지문에 굳은살이 동글동글하다

 

마름질 하다가 멈춘 한지가 바람 따라 대오리살을 휘익 감아올리고

어제와 오늘을 나눠놓은 이곳에 공민왕은 먼 우주에서 부채질할지 모르는 일

 

반야의 속치마 자락이 구름처럼 펄럭이고

합죽선 이야기로 접혔다 폈다 마무리 된 박물관은 고려의 하늘이다

 

고려인 얼굴들이 벽면에서 빗살무늬 그늘을 치고 있다

 

 


 

 

김하경 시인 / 도마 속의 삼족오(三足烏)

 

 

꿩을 다루는 주인 창을 던지듯 칼을 흔든다

 

고구려 왕릉에서 발굴 된 예맥 족들이

쌩쌩 불어오는 바람과 맞서 벽화 속에서 말 타기 즐겼다

 

우거진 숲 속 분주하게 달렸던 광개토대왕

달아나는 새의 날갯짓 힘보다

앞을 겨눈 시간들 창은 적들의 전략 앞에 빠르게 꽂힌다

 

사라진 고구려의 삶

짐승을 쫓는 눈빛이 햇살아래 반짝인다

 

엉덩이를 들고 말을 달리던 왕

흙속에 묻힌 지금

힘껏 던진 창살 여전히 심장에 번쩍거리고

꿩을 적중한 도마 위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북면 우주 꿩 요리 식당 주방

벽화 속 왕의 사냥터로 핏물이 흥건하다

 

날마다 하늘로 도망쳐야 할 꿩

지난 날 나의 힘이라면

앞만 겨눈 사냥의 힘

산속에 흩어진 삼족오 피가 칼도마 위에 벽화로 물들었다

 

다다다다 도마 위의 칼 소리 산등성이를 휘어잡고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식당을 나온다

 

 


 

김하경 시인 (1964~2016)

1963년 전북 익산 출생. 신구대학교 졸업. 201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2014년 <공중그네>로 전국 계간지 우수작품상 수상. 2015년 가을 첫 시집인 <거미의 전술>을 냈으나 급성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유고 시집이 됨. 전 양산 성모병원 원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