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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시인 /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라 사람의 한 생 잠깐이다 돈 많이 벌지 마라 썩는 내음 견디지 못하리라 물가에 모래성 쌓다가 말고 해거름 되어 집으로 불려가는 아이와 같이 너 또한 일어설 날이 오리니 참 의로운 이름말고는 참 따뜻한 사랑말고는 아이야, 아무것도 지상에 남기지 말고 너 여기 올 때처럼 훌훌 벗은 몸으로 내게 오라
-시집 『겨울 가야산』에서
배창환 시인 / 내 생애의 별들
서른을 채워 결혼하는 아이 덕에 벌써 두 아이 엄마 된 아이도 오고 아직 좋은 사람 없다며 선하게 웃는 아이도 와서 밥 먹고 술 몇 잔씩 나누고 헤어졌지만 돌아와 눈 감으면 어룽대는 것은 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차마 부끄러워 딴 애들처럼 교무실로 복도로 찾아 오도 못하고 교문 떠나는 내 뒷모습 훔쳐보며 목련잎 그늘에 숨어 울기만 했다고 오래 묵은 사랑처럼 털어놓고는 가슴이 조금 시원한 듯 웃는 아이, - 선생님, 그땐 다들 힘들었어요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된 아이가 말했다 - 오냐오냐, 내 다 안다 내 음성은 토란잎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그렁그렁 매달려 떨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굳게 입 다문 쇠교문에 매달려 울던 아이들 언젠가는 꼭 한번 빌고 빌어 용서받겠노라고 다짐했던 나 먼저 가던 길 지쳐 허덕일 땐 언제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아픈 채찍들 나눠 가진 상처 때문에 더 자랑스러운 내 생애의 별이 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배창환 시인 / 순두부백반 - 통일론
순두부백반을 시키니 비지가 따라 나온다 본디 한 몸이었던 콩알들이 맷돌에 부서지고 이겨지면서 알맹이와 껍질이 딴 그릇에 담겼다 그걸 내가 번갈아 떠먹으니 뱃속에서 다시 또 한 몸이 되었다 사람 사는 이치 또한 이렇다면야 우리도 이러면 안 될 게 무언가 이런 생각 두고 세상에선 사람들이 순수하다 할까, 순진하다 할까 남이야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순두부도 비지도 다 맛있게 넘어가고 속에선 좋다고 한동안 난리였다 배창환 시인 / 폐교에 대한 보고서
사람이 세운 것들 시나브로 낡아가고 저 홀로 난 풀들만 촉촉 눈 떠 일어나네 여기저기 아이들 고함 소리 뒤에 쟁쟁 남았어도 눈 뜨면 아이도 선생님도 더는 없는 곳 시간은 고장난 시계탑 안에 멈춰 서 있고 돌 그늘엔 영산홍 울음 점점이 흩어지네 아이들 타고 놀던 허리 굽은 적송 한 그루 짙푸른 해그늘 자욱이도 드리우는데 대성초등학교, 1972-2003, 937명 졸업생 배출 교사(校舍) 뜰엔 못 보던 교적비 하나 눈에 시리네 사라짐 앞에는 어떤 그리움도 속수무책일까 아이는 제 교실 기웃거리며 그저 웃기만 하고
배창환 시인 / 얼굴
아래채 고쳐 지으려고 흙집 헐어내니 천장 흙벽에 숨어 얼굴 한번 안 보여주던 기둥이며 대들보 서까래 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옛날 심산(深山) 식구들과 고즈넉이 살다 대목의 눈에 들어 이리로 시집왔을 적송 등걸들이 인근 구릉이나 논밭에서 져 날랐을 황토와 볏짚에 엉긴 채 무거운 짐 내려놓은 듯 너무 편안히 누워 있다 이 거무레한 몸으로 엄동설한 다 받아내어 이 집 식솔들 한세상 견뎌 살게 한 것인가 그 얼굴이 보고 싶어 그라인더를 댄다 지그시 힘을 줄 때마다 깎여나가는 시간 너머로 한때 푸른 대지와 심호흡 주고받았을 작은 옹이들이 별꽃처럼 파르르 돋아오고 햇살과 그늘 놀다 간 자리, 둥근 나이테로 살아오는데 나무의 얼굴에 가만히 내 얼굴을 댄다 오늘 나는 어떤 무늬로 살았을까, 먼 후일 나는 누구에게 어떤 무늬로 발견될까, 생각하면서 그 얼굴에 내 얼굴을 갖다 대면 내 생의 무늬도 한결 따스하고 환해질 것 같아서
배창환 시인 / 어떤 일대기
스물 셋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안 오는 농촌으로 시집왔다 대구에서 여상 졸업하고, 오래비 학비 대는 재미로 염색 공단 다니다 만난 청년을 따라 난생처음 하는 농사일에 온몸 쑤시고 다리도 후들거렸지만 두 남매가 제 얼굴 닮아 눈매 서늘하게 커가고 돈이 좀 만져지는 참외농사 재미가 쏠쏠했으므로 그녀는 신새벽에서 늦은 밤까지 남편 일을 도왔다 곱던 얼굴 볕에 그을고 손바닥이 까칠하도록 농사 물이 들 무렵 조막만 한 면 소재지에 다방이 여남은이나 들어섰고 도회지서 온 허벅지 미끈한 여자들이 오토바이로 차와 웃음을 실어 날랐다 재미 삼아 하우스로 몇 번 불러내던 영다방 김 양한테 미쳐서 돈 싸들고 따라다니다 함박눈 쏟던 날 사내는 결국 집을 나갔다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어린 아이들 늙은 시어미에게 맡겨두고 그녀는 이 악물고 두 사람 분의 농사일을 혼자 했다 그렇게 비바람 눈발 드센 들판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주먹 눈이 쏟아지던 밤, 사내는 상거지꼴로 돌아왔다 하지만 옛날의 그 사내는 아니었다 농사일은 아예 잊은 듯 골방에 틀어박혀 억병으로 마셔대던 쐬주로 한참을 몸 버리던 어느 날, 어디선가 전화가 오고 사내는 통장을 긁어 다시 집을 나갔다 그때 그녀도 함께 무너졌다 아무 데나 쓰러져 며칠을 울다 마침내 울음 그친 새벽이 왔다 대낮에도 귀신 나오는 컴컴한 대숲,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농약 병이 차갑게 빛을 뿜으며 뒹굴었다 타국처럼 낯선 땅, 뒷산 아카시아 비알에 그녀가 묻히던 날 하늘은 쨍쨍해서 비 한 방울 안 주었고 그녀가 누운 황토 새집 앞에 쓰러져 우는 사람은 친정 오래비,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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