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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시인(해남) / 희경루* 발꿈치에 힘을 주어 아이가 뛰어다닌다 소리를 깨운다 손뼉을 치고 신나게 이 마루를 부흥회처럼
책을 읽는다 나는 시계처럼 소리 내 자동차는 달린다 생활을 옮기는 하천 물소리
거슬러 책을 읽는다 소리를 막기 위해 소리 내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소리에 빠져 의미를 지우기 위해
비는 내리고 있다
쉿 조용히 해, 저 사람이 책을 읽고 있잖아 아이는 발꿈치를 들다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며
웃는다 해피, 이것 주워와 여자가 손에 든 보자기 같은 것을 공처럼 뭉쳐서 멀리 던진다 보자기 달린다 퍼진다 펼쳐진다 저만치 떨어진다 아이가 달려가 줍는다 강아지처럼
슈퍼맨처럼 되돌아간다 슈퍼맨 도와줘, 여자가 소리친 척 입 모양으로
소리를 더 높여 나는 책을 읽는다 아이는 받아쓸 수 없는 소리로 노래한다
하 ㄹㄹㅔ루야 하ㄹ ㄹㅔ루야
그만해, 저 사람이 책을 읽고 있잖아 소리죽여 여자가 소리친다 풋, 좀처럼 이 웃음을 던질 수 없다
일부가 너무 길다 그사이 비는 그쳤다
멈추지 않은 것 바퀴가 소리를 굴린다 퍼뜨린다 생활은 물과 함께 없는 해는 이미 다른 곳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여자의 손을 뿌리쳐보려 하지만 검은 지붕이 어둠을 막아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은 것들 흘러 넘치고 있다 *희경루 :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1567년) 속에 있는 희경루를 2023년 광주광역시에서 중건하여 광주천변에 세우고 시민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웃고 떠들고 놀고 쉬도록 허락하였다.
이서영 시인(해남) / 문밖에 그 자그마한 여자가 서 있는 것처럼 어떤 이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소하게 아주 사소하게 그때 너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의 작은 섬광이 등줄기로 지나갔음을 그 섬광이 평생 깜짝깜짝 내리칠 것을 모른다 들어와 잠깐 기다리라거나 기다리는 동안 뭐 좀 마시겠냐 물거나 차가운 물이나 뜨거운 차를 내오겠다 하고 저기 구석에서 너는 한 동안 서성 서성댄다 두근거리는 소리 두근 두근거리는 여자는 두리번거리지 않고 가늘고 긴 목을 가족사진에 고정 시킨다 벽엔 그 밖의 그림과 그 밖의 판화와 그 밖의 시계가 걸려 있다 힐끗 시계를 보는 눈길 눈길이 마주친다 눈동자 눈동자가 얽힌다 돌연 날씨 이야기나 정원의 장미나 길가에 버려진 자전거는 꽤 유용하다 벨이 고장 났나 봐요 열쇠 구멍이 없더군요 하루 종일 오래 걸었다는 입안의 모래 이야기 모래 까츨한 감촉을 혀로 굴리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다 흘러갈 것이다 이걸 흥미롭다고 해야 하나 위험하다고 해야 하나 장미는 한번 피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에서
이서영 시인(해남) / 무한화서
같은 자리에 가 같은 배경을 바라보다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연극의 한 장면을 연습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았다면 어제와 똑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사실은 날마다 꽃이 더 지고 있었고 나는 꽃잎을 밟지 않으려 발끝을 조금씩 더 들어야만 했다 바람은 발을 숨기고 아프지 않게 지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음 계절에는 내게도 바람의 발을 주시라 빌었다 한나절 봄비 사이로 꽃은 팔랑 몸을 던졌다 장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빈자리에 나무의 살빛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생이 교차하고 있었다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파란, 2022) 수록
이서영 시인(해남) / 깊어지는 골목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강한 믿음이 필요했다 신념이 분위기가 되기 위해 미래를 붙잡기 위해 제각기 방도를 찾고 있었다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깃발들이 흔들렸다 모르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기도 중이다
저 어둠 중 처마가 낮은 한곳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어떤 기분은 억누르기 어렵다 갑자기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사라져라 깊은 마음아
한 달에 한 층의 창틀이 생겨나 없었던 의도를 드러냈다
밝아져라 밝아지거라 창과 창공은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인부들이 먼지를 털며 어디론가 흩어졌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 정도는 아닌데, 그들이 웃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세웠다 누구에게나 희롱할 수 없는 자세가 있는 것이다
불안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골목은 불안을 기반으로 융성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들, 어둠만이 구원처럼 내리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닿을 곳이 없었다 끝이 안 보였다
계간 『작가』 2021년 가을호 발표
이서영 시인(해남) / 가까워지면 안 되잖아, 라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모자를 썼다 벗고 미간을 찡그리다 웃고 이를 보이며 환하게 조금 더 환하게 마스크를 벗다 안경을 썼다 나를 세워 두고 난처하게 하고 싶어요 평범한 날이니까요 배경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워요 문제는 표정들 어느 한 면도 숨기지 못하고 발각되는 마음들 돌연 나를 전부 삭제하고
배경을 벗어나요
분홍 살빛 자귀나무꽃 흔들려요 호수의 물빛 따라 흘러가요 접시 꽃대가 휘네요 휘어요 휘청 꽃씨를 좀 받아 가요 접시꽃이 몰랐으면 좋겠어요 꽃씨를 어디에 묻어 둘까 생각해요 접시꽃은 자신의 운명을 넘어설 수 있을까 내가 멀리 씨앗을 퍼뜨리겠어요 우리가 방황하던 담벼락마다 층층이 부흥하겠죠
새로운 불화를 쌓으며…… 쌓으며……
스피커가 불경을 읽어요 스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아무 뜻도 없는 말들도 계속하다 보면 경전이 되죠 대웅전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알지 못하는 빛살들로 교화되고 있어요
아 백일홍은 아직 아니에요
계간 <애지> 2021년 여름호 발표
이서영 시인 / 세량지(細良池)
나무가 물에 잠겨 있었다 무엇에 잠겨 산다는 것 물이라서
좋았다
다행이잖아 봄이라서
수온이 적당하기를 비가 저수지에 떨어질 때 네가 우산을 꺼냈다 둑방길을 걸으려 할 때 막 비가 와서
좋았다
우산이 커다랗고 동그랗게 펼쳐지고
자리가 생겨 나는 가방을 오른 어깨에 옮겨 멨다 왼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둘 곳 없는 손이 하릴없이 흔들흔들
저수지 안을 오래 기억하는 나무들 연둣빛으로 흔들리는 표정 두근대는 빗방울 나무를 더 자주 더 멀리 보냈다 흐려지는 물속을 들여다보며 비가 한참 오려나 봐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차가운 살
너는 내 손바닥 안의 비를 만져 보았다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무들이 더 빠르게 흩어지고
이서영 시인 /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나는 사람보다 꽃이 많은 시절에 살았는데 꽃을 보러 간 날을 달력에 표시해 두었다
함께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꽃에 붙여 주면 전생에 내가 잃었거나 낳았던 아이들 이름인 것 같다
은목련이라거나 백동백, 류장미, 진모란 가만가만 불러 보면
떠나 버린 사랑이 서둘러 돌아올 것만 같아
절대 미치지 않겠다
진달래 골담초 사루비아 같은 것을 똑똑 따 먹으며 배가 사르르 아파 오고
가끔 예상치도 못한 꽃이 덜컥 피어나 얼마 머물지 않고 또 떨어졌다
이서영 시인 / 밤의 출력
너는 여기 당도한다 라이트를 켠 차들이 빠르게 이동하고 사람들이 벗어나려 한다 새롭게 집요하게 창문에 기대 졸면서 여학생들 머리카락을 내버려 둔다 마음대로 흘러내리도록 마음대로 벗어나도록 어둠 따라 바퀴 따라 꿈을 따라 무채색 물감이 서로 휘감고 사라지듯 방지턱에 걸려 잠깐 눈을 뜰 때 폭발한다 너는 백발이고 주름져 있고 지쳐 있다 너는 쓸쓸하고 위엄 있고 버스는 너를 내려놓고 물러나고 나는 너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완전한 깊음 깊이 너밖에 안 보인다 이 도시의 심지를 자꾸 만져 본다 뜨겁다 뜨겁구나 어둠이 전부 증발할 지경이다 밤에도 어떤 구름은 떠 있으나 어림없다 씻어 내리기에는, 나는 붙잡지 못할 것이다
-시집 『안녕 안녕 아무꽃이나 보러가자』 (파란 2022)
이서영 시인(해남) / 억
내가 어렸을 때는 억이면 충분했다 소리만 내도 아득해지는 억 선생님은 조 경 해를 흑판에 쓰고 우리는 쓸 일이 아마 없을 거라 했다. 내게 조 경 해는 친구들의 이름 조 경 해를 넘어선 숫자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억이면 충분했다 소리만 내도 아득해지는 신혼집은 억에서 한참 모자랐지만 그래도 좋았다 서울에서 나는 억 아래의 방들을 전전하며 십 년을 살았다 내가 낳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주아주 큰 숫자들을 배웠다. 아이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 억은 조금씩 작아지고 억은 억대로 고민했을 것이다. 점점 작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이서영 시인(해남) / 사랑하지 않은 대가를 어디서 치르게 되나요
계곡에 잠깐 발을 담궜을 뿐인데 발등이 뱀피 무늬로 변했다 실핏줄을 따라 마구 쏘다닐 것처럼 망사 스타킹처럼 불온하고 불안한 것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합체되었다 혼도니아주 강가에는 뱀파이어 물고기가 산다 수영하러 온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유영할 때 리듬 따라 사람들의 몸 안으로 들어온다 부드럽고 은밀한 방문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생각을 않고 그 몸 안에 산다 몸을 절개하지 않고서는 쫓아낼 수 없다 어쩌지 못해 미뤄 둔 것들 잔혹한 꽃들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이서영 시인(해남) / 취생몽사 하루 종일 누워 지내라 적극 권장한다 누군 꿀물이 좋다 누군 매운 콩국이 좋다 하는데 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앓는다 몸을 말아 웅크리고 고양이가 새끼를 떼고 돌아누운 것처럼 갸릉갸릉 소리 내고 그 소리 듣고 서러워 서러워 간밤에 풀어놓았던 말들 조각 맞추며 네모난 천장이 저도 모르게 기우뚱거리는 것 슬며시 일어나 네모반듯 잡아 놓으며 어디서 난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빠지는 소리 듣는 일 쓸쓸함이 차곡차곡 쌓인다 후회 없이 행여 멀쩡하면 사라질까 봐 하루 종일 앓으며 돌아누우며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 파란, 2022년,
이서영 시인(해남) / 바래고 바래고 또 바래지는 것들 주름을 만들어 입술을 주머니처럼 오므렸다 침묵이 완성되었다 어쩌다 말이 필요할 때 손가락이나 배꼽 같은 것들이 나서서 사랑을 속삭였다
-시집 『안녕 안녕 아무 꽃이나 보러 가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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