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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환 시인 / 묵화
앞닫이가 열리고 야야! 부르는 소리에 우리는 온몸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달려갔다 간당간당 매달린 소량의 미끼에 즐거이 입이 꿰이려는 잔고기들처럼
조어는 언제나 순조로웠을 것이다 마저 낚싯밥으로 던지지 못한 채 앞닫이 속 눈깔사탕 반 봉지를 유품으로 남긴 증조할아버지는 눈깔사탕이 곧바로 몸을 바꾸어 술상도 꽃그늘도 화롯불도 들여오고 요강도 자리끼 대접도 부시는 짜릿한 손맛 만끽한 낚시꾼이다
비닐에 눌러 붙은 사탕 매달은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 가득한 밤하늘 예전처럼 재바른 시동 하나 낚는가 드리운 줄 살며시 잡아당기면 장죽으로 화로 끝 다드락 닥닥 만고강산 한 토막을 이으며 입질 하나 없는 목 나쁜 터로 옮겨가 센 나룻이나 외로 꼬는 할아버지가 중치 상치의 별들 사이 오련하다
강유환 시인 / 사춘기
보약 먹이듯 부어 주는 뜨물 받아먹고 흰 작약은 해마다 부엌 담 앞에 피어났다 어느 날인가 자취방으로 작약 뿌리 달인 물이 흘러들었다 그 물 마실 때마다 아랫배 잡고 구르던 생리통이 점점 말개지고 있었다 생무명에 붉은 소목 물들듯 진홍 물이 몸에 순조롭게 번졌다 수십 그루 작약들이 몸에서 깨어나 달마다 꽃불 점등해 주었다
—시집 <장미와 햇볕> 천년의시작, 2025
강유환 시인 / 고고천변*
내 소리 선생님은 수리성이 뭔지 애원성이 뭔지 음악적으로 설명하덜 못하고 목구녕 요만치 쭐여서 소리구녕 좁혀 아조 되게 질려야 써 그 손가락 크기만큼 좁히려고 목 외로 틀었다 입 오므렸다 하는데 자 가보더라고 어이 떡궁
중중모리 장단 맞춰 육십 년 반질반질 닳아 윤이 나는 소리 산천경개를 살펴보는데 만학천봉 봉우리 거침없이 올라 늘어진 잡목 칡넝쿨 얽힌 숲 지나 낙화 동동 뜬 물 지나 구부러진 장송 지나 광풍에 맞춰 춤추며 쉬지 않고 경치 끌어내다가 어이 얼른 따라와 거 아직 쌩목이여 쌩목
이태도 묵지 않은 소리 끌고 바삐 쫓아가며 소리 받을라 소리 지를라 장단 맞출라 기교 부릴 라 하나 추켜들면 하나가 빠져 중토막 탁 끊고 아이고 나는 죽어도 못 따라가겠다 열두 골 물 합수치는 대목 슬그머니 소리 않고 입만 달싹 계곡 물 담방담방 건너가는데 핏대 불거진 목 땀 뚝뚝 떨어지는 선생님 눈 지그시 감고 소리 되게 지르며 어드메로 가시는지
*수궁가 한 대목
강유환 시인 / 만나지 않았다
나라고 불리는 내게 그가 다녀갔다 행적이 적힌 단문의 문장들을 들고 갔다 서구의 어느 그에게서 불시착한 말도 있었고 그의 어느 그에게서 왔다가 길 잃은 사랑도 있었다 그는 속내들을 꽂아놓은 심장까지는 뒤적이지 못했다
우리라고 불리는 우리는 눈을 휘저어 사막이라는 단어를 찾아낸 적이 있었다 가장 내밀하여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꽃을 보다가도 달을 보면서도 문자에 기대던 입술들 함께 서로의 영혼에 살짝 누워보기도 했지만 깔끄러운 혀로는 등을 핥거나 쓸어주지 못했다
그의 나라는 내 심장에, 그는 한 번도 가까이 내려오질 못했다 머리에서 입까지 내려가는 거리만큼을 나라고 부르고 있었으므로 수억의 마주침은 주르륵 흘러내려 깊이를 낳지 못했다
그라고 불리는 그는, 나라고 불리는 나를 단 한 번도 불러주었거나 만날 수 없었다 바싹 마른 바람은 우리만 남기었다가 덮어주었다 나의 나라는 나는 그의 그라는 그와 나란히 모래만큼 헤아릴 수 없는 순간 속에 앉아 있었지만 영원 위에다 지우고 쓰는 법만 알았기 때문이다
강유환 시인 / 행성 일지
그는 붉은색 별이 되었다 내게서 몇 억 광년이나 멀어져버렸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를 밀어냈다 밀어낸 자리에 꽃씨를 뿌리고 차를 마시고 새들의 노래를 심었다
나를 굽어보며 머리 위에 머무르는 데에 그는 꼬박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다 먼지와도 같고 거품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은 그의 남루한 운행을 기억한 이가 또 있을까
적막한 그는 퇴창문 밀어올리고 동백꽃 산수유 자두꽃 번지는 길 따라가는 방만한 손발을 가두었을 것, 백설처럼 펄펄펄 창 앞에 지는 봄꽃과 몌별 대숲 긴 그림자마저 뒷문에서 사라지면 캄캄한 외줄 잡고 통화를 시도하던 그를 마소도 피해가고
쓸쓸하게 어두워지는 그는 떠돌이별 자신의 어귀도 찾지 못하고 더듬더듬 까마득히 줄을 놓아버려 방향도 없는 꿈길에 서 있었다
가장 찬란했던 그의 한때를 주유한다 휘황한 별, 그는 만년을 살 것처럼 뚝딱뚝딱 황궁과 사원을 세웠다 궐문 안 무성한 관목 숲을 헤치며 나는 그 별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무궁한 이야기들 따서 불룩해진 주머니를 털어 매양 하늘로 사다리를 놓았다
그의 빗장뼈 밑에서 까치발 서면 자 대고 키를 재던 그는 내 행성의 뒷전까지 줄을 그어주었다 내벽을 튼튼하게 쌓는 법은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오른쪽 눈을 풍류랑 맞바꿨다 더 이상 볼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깨진 도편 위를 치명적으로 걷던 그에게 남은 유산은 귀 한쪽이었다
소행성의 꼬리가 희미해졌다 내 벽 또한 두껍고 어두워 그를 찾아 나서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벽을 타고 그가 안으로 들어왔을까 죽음과 시간이 쟁여진 후 소행성은 다시 되돌아올 것인가
-시집 『꽃, 흰빛 입들』에서
강유환 시인 / 교양 있는 사람
나 여덟 살도 채 안 되었을 때 모깃불 지펴놓은 마당에 누워 촘촘히 박힌 별나라 구경하고 있으면 머리에서 종아리까지 지나가는 손길 가매꼭지 뒤꼭지 눈꾸녁 코꾸녁 눈퉁아리 팔꿈아리 배퉁아리 발꿈아리 낯부닥 껍닥 손꾸락 발꾸락 떡잎 노랄 때, 꿈떠 뭉그적거릴 때 느자구 없는, 저 저 땀사구 없는 지천으로 쏟아지던 말은 할머니 가신 뒤 가뭇없이 사라졌다 은마아파트 사거리 넘어 수서역 쪽으로 맘놓고 달리다 도발적으로 앞에 끼어드는 차 뒤에다 순식간에 원색적으로다가 튀어나온 말 저 저 느자구 없는 노무 시키 눈꾸녁 엇다두고 벌렁거리는 가슴 목소리까지 떨면서 소시얼 포지션이 있는 내가 얼른 주위를 휘둘러보는 광경 생각보다 앞서 급제동도 없이 조랑조랑 딸려 나오는 말덩이들 할머니는 내 등에다 쓱쓱 밭이랑을 일궈 놓은 것이다 그것들 여태껏 두둑에 묻혀 있다가 싹 틔우고 덩이줄기를 이루었다 이랑마다 잎사귀 무성하게 자라 제법 파랗게 물들어 옹골진 고랑들 무안에서 서울까지 등어선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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