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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태현 시인 / 거룩한 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4.

성태현 시인 / 거룩한 무

 

 

바람과 소리가 단절된 투명한 유리창 너머

서리서리 무서리 하얗게 내린 밭이랑

풍만한 여백에 삐죽이 그려진 삽화는

거두지 않은 한 포기 무다, 없다는 말의 동의어 무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과 공존하므로

둥글고 길쭉하게 원만한 형상으로 보여야 한다

침샘의 자극 없이도 입술만으로 부를 수 있는 단음의 형태소

무수나 무-우처럼, 무시로 잦아질 형용도 아니다

따뜻한 밥상머리에 당당히 존재해야 할 중후한 명사다

 

무, 진즉에 도마에서 존재증명이 발부되었다면

모호하게 호명되는 그 이름이 무색하였을 것이다

언 솔가지 활활 타는 양갓집 양은솥단지 저변

고추장범벅에 깔려서 팔팔하게 요동쳤을 고등어

토막난 갈치의 육즙을 얼마만큼 비릿하게 우려냈을까

군불 지핀 사랑채에서 살얼음 아삭이 씹히는 동치미 국물

겨울밤을 지새며 짚일하던 나이 어린 머슴들에게

볼퉁이 가득, 찐 고구마를 목메게 삼켜주었겠지, 그 시절

가난뱅이 밥상에서도 향긋하게 풍겨왔을 무향

 

허구한 날 생채로 썰리고 잘려서 묻혀도 서럽지 않았거늘,

이대로 무미하게 건조된다면 무슨 말랭이도 되지 못한다

된서리 내리는 날, 꼿꼿하게 얼어서 무연히 사라지고 말 무

삭풍이 심근에 저며들고 하지정맥에 퍼런 심줄이 돋아도

거룩한 식탐의 여백에서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무의 말은 허무가 아니다

무아지경으로 회귀하려는 자각인 듯

무위자연으로 무마하려는 몸짓인 듯

온 몸의 진액을 청초한 이파리로 퍼올리고 있다

마침내 저 무는 서리 밴 시래기로 진국을 우려낼 것이다

 

-문학무크 『시에티카』 2012년 상반기호,6호 발표

 

 


 

 

성태현 시인 / 톱에 대한 명상

 

 

무쇠라도 자르는 강고한 쇠붙이가 톱이라 믿었어

여린 매화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는 꽃샘바람

심기가 불편했는지 절절히 애를 끊는,

절창의 소리로 맺힌 톱날의 울음이 들려왔지

창틈에 귀를 기울이자

홀연히 나타난 박쥐가 비음을 섞어 넣고 있었어

여리고 가는 것을 썰지 못하는 톱날의 통곡이었지

 

절치부심하지 않으면 톱이라 할 수 없어

부러지는 날까지 밀고 당겨야 하는 톱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옴짝달싹할 수도 없게 되지

생살의 단면이 보일 때까지 잘라야 살아남아

어긋나면 수족이라도 자르고 싶지

반듯하게 엮는다는 강박을 먹고 자랐으니

톱이 흘린 땀이 톱밥일 뿐,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어

그를 탓하지 못할 이유가 거기에 또 있었지

이가 다 빠질 때를 기다려봐

톱이 되기 위해 날을 갈고 있는 뾰족한 몸들이

날이면 날마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톱, 날카롭게 날이 섰다고 믿게 되거든

뻣뻣한 네 몸통을 활처럼 휘어잡고 손톱으로 긁어봐

허공이라도 자를 듯 비통하게 울부짖게 될 거야

결국 너도 톱이 된 거지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박쥐가 자라고 있는 거지

 

-<시인시각> 2010년 여름호

 


 

성태현 시인 / 꼬리의 기원

 

 

봄이 오자 철새도 아닌 작은 딱새가

남방의 어느 나라에서 한류를 타고 날아왔다.

가무잡잡하고 체구가 작은 그녀가

정림동, 시내를 관류하는 갑천변에 홀로 둥지를 틀었다

농익은 주황빛 꼬리를 몇 번 흔들어대자

파파라치들이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황소가 긴 꼬리를 내두르며 파리를 쫓던 날

건달 이도령이 합죽선을 차르륵 펴들었다

사랑사랑내사랑이야, 목을 빼고 사랑가를 부르자

남원 고을 퇴기의 딸 춘향이가 그에게 쏙 빠졌다

담배 연기 자욱한 ‘국제반점’ 골방

화투장을 부채꼴로 틀어잡은 착하게 생긴 타짜가

쾌재를 부르자 쭉 빠진 그 여자, 쏙 빠졌다

 

몸통이 새파랗고 꼬리가 붉은 작은 새

희귀종 부채꼬리바위딱새가

할말이 많은 듯, 속삭이듯, 때로는 목청 돋우며

애절하게 얼레리삐삐쏙쏙, 꼴레리삐삐쏙쏙

부채꼬리를 활짝 펴들고 흔들어대며 짝을 찾고 있다

얼레리, 어느새 나도 그 새에 쏙 빠졌다

 

오늘 또 두 시간째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찌리릿찟찟, 찟찌르르 내 꼬리뼈가 소리를 내지른다.

애석하게도 나는, 기원전 279일

출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심연을 유영하다가 꼬리를 잃었다

사르르 불사르르 타는 저 핏빛 부채꼬리

댓가지 부챗살을 타고 더운 피가 흐르는

철없는 인간이, 인간이 되기 전에 자른 사람의 꼬리다

 

 


 

 

성태현 시인 / 대칭구조와 타협의 접점

 

 

머리가 둘 달린 KTX는 서울과 부산을 오고 간다

진자의 추처럼, 앞자리에 나를 마주보고

역방향으로 앉은 낯선 여인의 반듯한 얼굴을 본다

날선 코를 축으로 공존하고 있는 두 볼과

두 눈, 대칭점을 접었다 펴고 다시 접어보았더니

그녀의 두 눈에서 기다란 더듬이가 쏘옥 기어 나왔다

여인은 서울의 길목 어디쯤에서 날개를 펼쳤던가

호랑나비 한 마리가 휑하니 날아간 들판을 지나

기차는 달려가고 있었다 객차마다

중간쯤 낯선 얼굴끼리 맞대고 앉은 자리

사람들은 저마다 앞자리에 앉은 얼굴을 접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할하는 탁자 위에는

길게 그어진 분계선이 있다

서로 접다가 구겨진 얼굴에서 노기가 일면

그 점선을 축으로 차르륵 객차마저도 접힐 것이다

이제 눈길을 거두어야 할 때다

저 낯선 여인과 부딪히면 탈선을 일으킬지 몰라

차라리 눈을 감으려는 찰나

내 얼굴을 접던 여인의 눈길이 멈추고

여인은 옆 좌석으로 비켜 앉았다

나도 손가방 속에서 낡은 시집을 꺼내 들었다

충돌 직전에서야 서로 눈길을 거둔 것이다

타협의 접점을 찾아 조금씩 비켜섰을 것이다

 

-시집 「대칭과 타협의 접점」 2013년 詩와에세이

 

 


 

 

성태현 시인 / 양말을 벗다

 

 

발등이 가려워서 구두끈을 풀었지

깔끔한 줄무늬가 보여야 하는데

성글도록 해이한 이면이 보였어

온종일 양말을 뒤집어 신고 다녔다는 걸 알았지

한 가닥 느슨한 실올이 최후의 양심과도 같아

은근히 발등을 조이고 있었던 거야

오늘은 여러 사람을 만났지

친한 사람이나 낯선 사람과도 눈길이 마주쳤지

 

안부 묻고 흥정하고 부탁하고 잘난 척하고

오로지 매끈한 문양을 짜 넣으려고

날줄과 씨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안간힘을 다 썼지

실수였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배후

요목조목 틀어쥐고 있었던 거야

걸핏 그들의 눈빛이나 귓전이 거슬리곤 했어

서로 피하고, 어긋나서 갈라지고, 끊어지다가

툭 불거진 매듭까지 낱낱이 발각되었어

 

더부룩 일어선 보푸라기마다 온기 품고 있었는데

뒤엉킨 양말의 이면에서 실마리를 찾아냈어

훌렁 양말짝 벗어 던지고 가는 거야

어차피 진흙밭이니, 맨발가락 사이

내처 간질간질 차진 진흙이나 밟으며 가야지

 

ㅡ『시에티카』2011년 상반기 제4호

 

 


 

 

성태현 시인 / 동전의 두 얼굴

 

 

두 눈에 붉은 등을 켠 커피자판기 앞에서

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땅에 굴러 떨어졌다

그 자리에서 현란하게 자전하는 구체

값싼 액면가를 감추려는 가벼운 몸짓이 아니다

양면을 다 수용하려는 필사의 의지가 아니라면

채 반 바퀴도 돌지 못할 것이다

지구의 자전은 그치지 않았는데

종국에는, 한쪽 면만을 드러내고 쓰러질 동전

통속을 거부하는 대왕의 지친 거동으로

누구라도 그 어전에서 살의를 품지 마라

 

허리를 굽혀 창백한 용안을 더듬어본다

한 푼의 두께는 백지보다 조금 더 두텁다

한 번도 마주본 적이 없을지라도

출생의 비밀은 백지 한 장의 차이로 좁혀졌다

태생적으로 양립할 수밖에 없는 형상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등진 채 반목하리라

모난 데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원만한 백 원짜리 동전의 액면

연대를 거스르는 상평통보로부터

수백 년, 묵혀온 알력의 DNA가 잠복해 있을 것이다

 

대왕이시여, 후대의 왕들이 나랏동젼의 얼골을 서르 사맛디 아니하게 지어 어린 백셩들의 말싸미 그치지 아니할새 이랄 어엿비 너겨 새로 쇳물을 끓여 탱자처럼 동글게 맹글어 주소서

―이제, 머지않아 이 시는 빛을 보기도 전에 버려질 것이다

주화의 한 면도 옳게 읽어내지 못한 시인은

두텁게 양각된 지존의 형상을 세종대왕으로 오독하지 않았는가

충무공이시여, 큰 칼을 뽑아 시인의 무지와 불충을 단죄하소서

 

 


 

성태현 시인

1954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 한국방송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2008년 계간《시에》 신인상에 〈대칭과 타협의 접점〉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대칭과 타협의 접점』. 현재 시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