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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승일 시인 / 빛과 그림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7.

박승일 시인 / 빛과 그림자

 

 

몇 번을 벼르다

마침내 올라 보지만

산을 즐기는 이들에겐

작은 언덕에 불과 한 것을

힘겨워, 힘겨워

중턱도 못가고 주저앉았다.

 

무엇이 나를 이처럼

숨 가쁘고 어지럽게 만드는지

곧장 허물어질듯

하늘마저 노랗구나

 

사람으로 생겨나

대쪽 갈라지는 소리 한번 못 내고

실바람에도 휘청거리는 갈대같이

아, 흔들리고만 있거늘

 

빛처럼 지켜주던

그리운 이들 하나, 둘 떠나고

몸도 마음도 힘겨운 사월의 언덕에서

나는 내 그림자 베고 누워

다만 하늘을 바라볼 뿐이니…….

 

 


 

 

박승일 시인 / 천문

 

 

누가 토끼를 달 바깥으로 꺼내 놓았나 고삐라도 쥔 듯 은하를 몰고 다니더니 이마에 부서지던 별빛, 오늘에 이르러 청량한데

 

새는 요약된 공중, 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완성되었어라 다 해진 날개로도 권역을 이탈하거나 경직되지 않으니 새떼가 운용하는 천문은 날개로 풀어야 하는 것 돌출 한 부리로 끊임없이 기록하는 저 고지식한 운항일지

 

풍덩, 돌 한 덩이로 풀이한 운수도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종족놀이에 빠졌던 우물 안 개구리들 제법 골똘해진 것 아니겠니 절반쯤 심사숙고 하는 자세로 딱딱한 돌 속에 틀어박혀 외우는 주문이 왁자한데 돌께서 점지한 오늘의 운세는 개골개골, 봄밤에 기탄없구나

 

물거품이 자꾸 부풀어 오르니 물이 제맛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안절부절 숨 가빠하는 물고기들의 난항이 하늘에 닿았음에도 왈가왈부, 미루고만 있으니 아아, 신들도 권태에 몸부림치는구나 회의에 들었구나 그럴진대 한 번쯤 관행을 고치는 것도 힘에 부친 우리의 점괘는 생계형 근심주의자

 

 


 

 

박승일 시인 / 하얀 밀림

 

 

 폴폴, 깁지 않은 그물코를 빠져나온다 공중 한복판 널따랗게 펼쳐진 깃을 털어내면 모두가 낯설다 유리창 너머 삭제된 광경을 덮어쓴 채 엎드린 지평 위로 물기 걸러낸 음표들, 한 호흡 뒤처져 맨발로 까딱까딱 목발을 거꾸로 짚고 서 있는 저 게으르고 반항적인 몸짓을 보라 서로 떠밀고 떠밀리며 엉켜 있는 바깥, 얼마나 녹아들고 싶었던 걸까 해쓱한 표정으로 지싯지싯 타오르고 있다 하얀 밀림의 입술로 뜨겁게 빨려든다 0°C로 가라앉는 고요한 열창, 빙긍빙글, 구름의 귀가 트인다

제 무덤을 향해 희끗희끗, 무장해제를 당한다 불쑥 불거지기도 하는 불협화음을 몸에 장착한다 스스로 지은 수의를 걸치며 짐짓 날개를 접는다 열어 줘, 열어 줘, 풍경의 뚜껑을 덮었나 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쓸쓸한 유감

 

 


 

 

박승일 시인 / 몇 개의 재발견

 

 

 새

 부리로 받아 적고 날개로 지운다 공중은 함께 나눠 쓰는 그들만의 공간, 썼다 지웠다 판에 박힌 학습, 만 번의 비행을 거듭하고 있다

 몸속 어딘가에 복제된 세계지도, 한 번도 써먹은 적 없었으므로 길을 잃어 본 적 없다

 

 늑대

 고독을 짜깁는 기술자, 한 음절의 울음으로 초승달의 여백을 채웠던 시절도 있었다 오래전 인간의 유전자를 훔쳐 진화했던 탓에 대개 멸종된 종족

 보름달이 뜨면 본성을 되찾는 무리다 술에 취해 우짖는 사람의 눈매를 닮았다

 

 바람

 산과 바다 구름 사이의 의견충돌이다 해소되기까지 몰려다니는 까닭에 부침이 심하고 변덕스럽다

때때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했을 때는 분분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입자를 분석해 보면 지구 곳곳의 표정을 검색할 수 있다

 

 나비

 허공에서 피는 꽃, 꽃의 영혼이다 절반의 웃음과 울음으로 건네는 사무치는 인사법이다 향기를 보고 깔깔대는 꼬마천사의 손뼉, 하느님의 작은 날개다

 보고 있으면 눈이 다 해질 것 같은 다큐멘터리, 봄날의 폭설이다

 

 연필

 몸 밖으로 나온 혀다 검은 피로 진술 한다 상상력이 부족할 때면 종종, 몇 잔의 커피를 필요로 하나 짧아지거나 부러지면 칼에게도 베이는 것이 필연적이다

 또르르 굴려보면 모두가 시험에 든 지금이 딱 그렇다

 

 


 

박승일 시인

1957년 부산 출생. 2011년 《詩로 여는 세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