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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진희 시인 / 그리운 멍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7.

권진희 시인 / 그리운 멍

 

 

시청 근처 헌책방에서 산책

돌아와 펴보니, 표지 뒤의 간지가 뜯겨 있다.

거기에 적혀 있었을 기명이나 날짜 따위를 생각한다.

그걸 뜯어내고 이 책을 팔았을

그 뜯김의 순간을 생각한다.

뜯겨나가도 뜯어지지 않는 자리에는

흉이 진다. 책의 흉터가

크레바스처럼 벌어져 있다.

깊고 어두운 크레바스 저 아래에서

여태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 너와

우리들 머리맡에 밤새 내려쌓이던 눈과

눈길 위에 푸른 멍 같은 발자국을 새기며 돌아서던

너를, 보내던 그날의 나를, 본다.

 

너 오래 거기 있었구나.

 

뜯어내어도 뜯겨지지 않는 생의 순간이 있다.

보이지 않으려고,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파랗게 돋아나 나를 바라보는,

그리운 멍이 있다.

 

-시집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에서

 

 


 

 

권진희 시인 / 지렁이 가는 길이 꽃길이다

 

 

몸이 끊어져도

땅 밑 단단한 어둠 몸으로 밀어서

길을 만든다

 

헤쳐 나간 구불텅한 자국 따라

꽃들 뿌리를 내린다

 

지렁이처럼 지렁지렁

꽃길 만들어 가라고

 

생의 길은 늘

단단캄캄하다

 

지렁이가 가는 길이

꽃길이다

 

-시집 『어떤 그리움은 만 년을 넘기지』에서

 

 


 

 

권진희 시인 / 벽돌 한 장

 

 

새벽길 리어카 위에

벽돌 한 장

 

검정 고무줄 억센 힘으로 얽어놓은

푸른 비닐로 감싼 지친 하루

 

그래도 금세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은 내일 위에

무겁게 무겁게 눌러놓았을,

 

누군가의 손길 가만가만 간직하며

동짓밤 고스란히 새우고 앉아 있는

 

의젓하구나, 벽돌

저 한 장의 힘!

 

 


 

 

권진희 시인 /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비오는 저녁 숲에 갔다

흠흠거리며 비 먹고 선 저녁 나무들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소리 들으며 숲길 걸었다

걷다가 나무들 사이에 말없이 선

물푸레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죽은 물푸레나무,

뒤로

도토리나무 개암나무 느릅나무 사람주나무 무성한데

뒤로

저녁 해 진다

 

물푸레나무 앙상한 가지 사이로

노을빛 저녁 해 지나간다 죽음이란

낱낱이 앙상한 것이었구나

지금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월만큼 욱닥거리는 5월 저녁 숲에서

물푸레나무의 젖은 실루엣처럼

어디서 저녁 새 운다

 

새들은 어디서 날개를 접는가

오늘의 새 울음은 아무래도 어제의 새 울음이 아니다

물푸레나무는 자유로운가

나는 무엇으로 서 있었던가

 

울다가 생이 다해서 죽은

새가 보고 싶다

 

 


 

권진희 시인

1967년 대구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문학석사, 同 대학원 박사과정. 1996년 《사람의 문학》 겨울호에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어떤 그리움은 만 년을 넘기지』. 2012년 우수문학도서 선정.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