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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지 시인 / 안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8.

이향지 시인 / 안심

 

 

나비가 날개를 반성하는 때,

꽃이 꿀을

사람이 욕망을

자동차가 질주를,

 

잠 깨어 아침에 보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반성하는 때,

해파리가 분열을

고래가 저인망을

물총새가 잠수를,

 

점심때 식당에 가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뻐꾸기가 제 울음을 반성하는 때,

라일락이 향기를

장미가 가시를

훌라맹고가 춤을,

 

저녁 무렵 한 바퀴 돌아보니 모두 제자리에 있다.

 

모두가 제자리에 있어 주어서,

내 꿈은 안심하고 다시 꿈꾸러 간다.

 

-2014년 시집『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방울토마토

 

 

 방울토마토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나는 방울토마토나무였는데, 지금은 없다. 효정이가 먹었다. 경로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그 아이들은 탐스러운 방울토마토였는데, 지금은 없다. 내가 먹었다. 그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가 먹었다.

 

 방울토마토·국산

 중량 412g 100g 당 310원 가격 1277원 포장 년월일 00.2.17. 판매처 암호 0204437012777 업종 기타식품판매업

 

 방울토마토 지금은 빈 용기만 있다. 동글동글 잘 익은 방울토마토. 현대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다시 만났는데, 새빨간 심장 한 곽을 다시 만났는데, 지금은 찢어진 투명과 빈 용기만 있다. 아침까지 있었는데, 새빨간 심장 네 알이 내 앞에 남아있었는데, 내가, 방울토마토가, 방울토마토나무가, 한 알씩, 씻어서, 먹어서, 없다.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에서


 

이향지 시인 / 풀단

 

 

 낫이 풀을 지나간다. 풀들은 쓰러지며 흩어진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풀로 풀을 묶어준다. 좁은 대로 풀들은 다시 뭉친다.

 

 짧은 풀일수록 긴 풀의 위로가 필요하다. 풀이 풀을 안고 소꼴로 가는 길. 소 숨소리 가까울수록 긴 풀 오금이 풀린다.

 

 소의 고삐도 위로가 필요하다.

 

 풀 베는 낫도 위로가 필요하다.

 

 개밥바라기도 위로가 필요하다.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배고픈 벌이

 

 

 벌집에서 꽃까지의 길이 봄이다. 역행이 순행을 이끌어 왔다. 역행하는 벌이 없다면, 꽃이 어찌 깊은 눈을 녹였겠는가. 배고픈 벌이 꽃까지의 길을 만든다.

 

-시집 『햇살 통조림』 에서.

 

 


 

 

이향지 시인 / 환(幻)

 

 

두개골을 바수어 독수리에게 던져 주는

고원 사람들의 장례

 

매장할 만한 흙도

불태울 만한 나무도

구하기 어려운 곳

희박한 희망마저 새가 가져가는 곳

 

너무 깊고 맑아서 숨이 막히는

하늘을 제압하며

느릿느릿 날고 있는 빛깔 검은 무덤들만

살이 찌고

숫자를 불려 간다

 

하늘로 치켜 올려졌다 내리꽂히는 해머에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아주 잠깐의 햇살

 

새로운 피를 흡족하게 마시고

날마다 되살아나는 붉은 태양 아래서

 

허기진 풀들은 기다린다

독수리 배 속에 갇혀서

높은 하늘을 날다가

조분으로 돌아올 골육들을

 

살아 있는 납골당

길고 좁고 어둡고 구불구리는 관을 끙끙 밀고 나와

마을 밖 풀밭에서 햇볕을 쪼이며 쉬고 있는

조분 몇 덩이

 

새로 돋은 풀잎을 찾아

양떼를 몰고 온 아이는

젖은 조분을 피해 앉는다 그제 죽은 할아버지를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그림자가

미래의 점심상 위에

크고 느린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리고……,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 시인 /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뒤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분 걸어도 안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집 『햇살 통조림』에서.

 

 


 

이향지(李香枝) 시인

1942년 통영 출생. 부산대학교 가정학 학사. 198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구절리 바람소리』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 『내 눈앞의 전선』 『내 눈앞의 전선』 『햇살 통조림』. 2003년 제4회 《현대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