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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우 시인 / 바람
너 어디서 오는가
쥘 수 없는 순간을 향해 정처 없이 일어나 쉼 없이 달려온 살갗 간질이고 사라진 비릿한 눈동자
어둠 속 차갑게 누워 헤아리던 날숨 흐릿한 새벽 겨운 몸을 일으켰으리라 왼발의 무게에 눌린
삭힐 수 없는 울음 산천에 떠돌 때 빛나는 가지 위 움츠린 삵은 흐르는 달에 뚝뚝 선지를 닦는다 핏자국 선명한 절망
여린 체온 덥히는 부러진 가지 서늘한 어둠을 찌르고 있다 비켜서라고, 싹을 틔울 터이니 토해내는 끈적한 울음
태양이 흔들리는 새벽
너 어디로 가는가
홍승우 시인 / 붉은 원피스
하늘하늘 긴 머리 허리 밑에서 살랑
여리여리 두 팔로 연인의 손과 마음 꼭 쥐어
버드나무 그늘 가에 숨었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하얗고
바람에 날리는 가지 사이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샤넬 향 풍기는 빨강 장미
홍승우 시인 / 그림자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나간 하루
잠깐 넋 놓고 땅을 바라 보는데
그림자 하나 쏜살 같이 내 입에 쑥 들어 왔다
등 뒤로 사라지는 갈색 꼬리 잘가라며 흔든다
시다
홍승우 시인 / 시월의 마지막 밤
시월의 마지막 밤 외로이 홀로 보낸다면
우렁각시 우렁신랑
잠자는 내 곁에 살포시 누워 날 껴안아 줄런지도 모른다
눈가에 머무는 마른 눈물에 불쌍타고 숨어 울지도 모르고
잠결에 부르는 그 이름 슬쩍 적어
나 몰래 이름 주인 맘에 달려가
시월의 마지막 밤 내 꿈을 꾸게 할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부른 이름도 혹시
홍승우 시인 / 자백
구로역 가는 길
쇠기둥 옆 가장 편한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읽어가는 즐거움 소음 사이에 소음이 놓이고서 몇몇의 그녀들은 희미해져 버렸다
꼬여진 두 다리 밑 그림자 깊은 눈앞에 자리한 붉은 입술의 여인을 향하여 눈동자로 과도를 쥐었다
깎는다
때이른 찬바람에 급하게 소환된 회색 민소매 울 원피스부터 까칠한 스타킹 담은 검은색 뾰족코 하이힐까지
놀라 움직이지 않도록 쥔 힘을 빼고 부드러운 결을 따르리라
하얀 속살 아래 뚝뚝 떨어지는 육즙,
울대에 고인 마른침은 서둘지만 두 눈을 감아야 한다
내릴시간이다
홍승우 시인 / 고흐의 방
멀뚱하니 흐르는 노란색을 바닥에 잘 문질렀다 몇 번이고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노란색은 어느새 먼지 뒤집어 쓴 구두를 삼키고 넘실넘실 침대 발치까지 넘보고 있다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에 구멍을 내니 별이 흘린 눈물이 빙글빙글 돈다 대지는 왼쪽으로 흐르고 하늘은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하늘에선 노란색이 쉴새없이 쏟아져 두 손으로 뚫린 구멍을 막아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노란색은 질척하다
손목을 지나 팔목을 지나 어깨에 머무르다 젖꼭지를 스치고 뚝뚝 발등 위에 떨어진다 기어서 지붕 위에 오르니 울음을 그친 별이 웃고 있다 웃으며 춤추고 있다 펄쩍펄쩍 속치마를 들추며 춤을 춘다 가랑이에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은행잎 노란색이 흔들린다
새벽 귓가에 바람은 스윽스윽 벽을 칠한다 짐승같은 검은색을 칠한다 검은색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륵주륵 별 대신 울고 있다 검은색은 맛이 쓰다 하얀 가루약 마냥 쓰다 어디가 아파 먹는지 잊은 가루약에 취해 잠든다
별이 빛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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