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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시인 / 물때
욕심 많은 달은 하루 두 번 층층이 쌓인 바닷물을 흔든다. 그 소리에 바닷물은 무너져 엉겨 붙은 서로를 밀어내고 바위에 부딪혀 부서진다. 바닷물을 덮고 단잠 자던 물고기들이 놀라 부서진 바닷물을 흩트린다. 저 멀리서 달이 바닷물의 뒷덜미를 물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바닷물을 걷어 낸 자리 그 바다의 품으로 양동이가 거칠게 들어온다. 따뜻한 바람이 진흙의 물기를 훔쳐 달아날 때쯤 가득 찬 양동이 뒤로 여기저기 상처 난 진흙이 보인다. 달이 바닷물의 등을 떠민다. 바닷물이 진흙 틈으로 다가가 아픈 상처를 조용히 보듬는다.
-《공시사》 2023년 10월호.
김태우 시인 / 무국적자
한동안 불길한 이름은 달동네에서 유행했다
무거운 피를 가지고 태양 곁을 얻을 수 있다면 목을 내놓겠어요 이빨 자국을 남기시겠다면 깨끗한 목덜미도 준비할게요 부디 낮에 빛나는 문양으로 수놓아주세요 멀리서 바라본 그대가 도망가지 않도록
나는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의 또 다른 흉터죠 핏방울이 맺힌 자리를 긁을수록 허물어지는 달 아래서 익명에게 내 곁을 내줘야겠어요 익숙하게 비워 둔 자리에서 날 불러줘요 그대의 목소리가 닳을 때까지
내 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어요 내가 옅어지면 햇빛이 앉은 목덜미는 빛날 거예요 그때 내 이름을 불러줘요 그대만 아는 유일한 단어로
더 이상 동네에서 빛나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공시사》 2015년 10월호(창간호).
김태우 시인 / 고고(呱呱)
세상의 얼룩인 당신, 울음에서 격리된 채 첫 눈물을 분실했나요 더 이상 울지 못해 울음마저 배설했나요 당신이 쏟은 세상에는 얼룩 하나 없네요 당신의 방향에서 우리 만나요 출출한 애착이 선택한 텅 빈 울음에서 당신을 찾을게요 얼룩이 흐려지면 좀 더 울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적응하면 흔적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당신을 지울 테니 당신의 자국도 함께 숨겨요 처음 본 울음의 이름은 당신, 잉태한 대가는 눈물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네요 차라리 세상에서 우리가 마르면 당신의 결말을 지울게요 삭제된 세상의 얼룩에서, 당신이 뱉은 내가 당신을 뱉을 때까지.
― 『동명이인』, 걷는사람, 2023.
김태우 시인 / 주먹의 맛
책가방에서 교과서가 지워진 날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사이좋게 나눠 먹는 법을 배우고, 조각난 형의 사탕을 훔쳐 먹었다 불편한 가죽에 던진 주먹에 달콤함이 묻었다 금이 간 얼굴에서 깨진 사탕이 떨어졌다 형의 얼굴을 때릴수록 떨어지는 달콤함은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탕향이 녹기 전, 형은 애꾸눈을 하고 집을 떠났다 형이 흘린 눈물 한 쪽이 말라있었다 정지된 노래만 밟히는 방문을 잠갔다
복종은 주먹의 크기와 비례했다 형의 작은 주먹을 담은 사탕 봉지에서 설탕 가루가 떨어졌고, 파리들이 모였다 흩어지지 않는 무리의 행렬은 형이 떠난 후에도 빈 방에서 발견됐다 실종된 형의 달콤함은 녹지 않았다 식도를 넘어 끈적이는 주먹의 맛은 형을 닮아 시큼했다 악명 높은 주먹에게 눈물을 빼앗긴 날에 방문을 열었다 사탕을 씹으며 주저앉은 콧대를 세웠다
형의 책가방은 무거웠다 상처의 무게를 짊어진 어깨가 욱신거려도 형이 흘린 눈물은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주먹은 자라지 않았고, 달콤한 사탕의 맛도 볼 수 없었다 맑은 하늘은 형의 뒷모습에서 주저앉았다 이제 나는 사탕을 먹지 않았다
학교에서 멀어질수록 주먹의 모양은 붉었다 가벼운 책가방을 들고 형을 찾아 집을 나섰다 사탕 봉지에서 새콤한 맛이 났다
-『시와미학』 2015년 겨울호
김태우 시인 / 그대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다운 그대 아카시아 나무처럼 향기로운 그대 아침 이슬처럼 싱그러운 그대 앞만 보고 달려 놓쳐버린 옆을 쳐다봐. 눈길 닿지 않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옆을 쳐다봐.
김태우 시인 / 원치 않아도 일어나는 일들
태어나 처음 죽음을 목격한 우리는 박수를 치며 케이크를 잘랐지
촛불은 입김이 결정한 시간 동안만 흔들렸고 아름다웠어
우리는 케이크에 꽂힌 초의 행동을 모른 척했고
마지막 촛불 앞에서 노래를 불렀지
케이크 위 초의 개수는 우리가 당신을 기억한 횟수야
축하 노래 끝에서 우리는 앞에 놓인 케이크를 잘라 먹었어
아무렇지 않게 둘러 앉아 서로의 나이를 물어보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억에서 서로를 위해 박수를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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