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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수 시인 / 무좀
좁혀지는 구멍에 말라가는 민들레가 살고 있다면 노란 향기를 눌러 짤 수 있지 옛날 맛집을 찾아보세요 배다리 막국수나 숭의동 밴댕이 집 눌러 붙은 파리똥이 질겅거리는, 가끔 누런 종기가 터져 골목을 뒤덮는 장마에는 신포동 칼국수가 생각나지요 어젯밤 가려운 바닥을 긁는 동안 시간이 겹쳐진 염증들이 불쑥 터지곤 했는데, 못 다한 이야기들은 시멘트 담을 넘어 붉은 스레트 지붕 위에서 말라가고 있지요
조연수 시인 / 관찰의 힘
두 귀는 닫혀서 열리지 않고 상쾌한 유머는 사라졌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의자를 지나는 지점 붉은 꽃을 피운 개발이 고개를 숙인다 변기 속 물관이 퍽 퍽 소리를 낸다 막힌 속을 뚫을 수 있다면 집착도 한 끼 때우는 식사 얼마나 짜릿한 환상인지 빛은 거실 바닥으로 넓게 퍼진다 마지나타를 끌어와 빛줄기에 세워 둔다 침묵이 때로는 긍정의 저항이 되고 오늘 나는 멈추지 않는 빛줄기에 침묵하고 변기 속을 관통하는 물줄기에 목례한다 아직 겸손하게 고백하지 못한 상처 빛줄기를 따라 더 길게 발등을 오른다
-시인정신 2014년 겨울호
조연수 시인 / 나는 K가 아니다
이것은 몸 안에 사는 상자 이야기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K는 등에 상자가 들어 있다고 했다 아니 상자가 아니라 적막함이라 했다 아니 적막함이 아니라 발톱을 감춘 토끼라 했다 마루 끝에 앉아 손톱을 다듬어주거나 매니큐어를 발라주던 노을 진 운동장에서 그네를 밀어 주던 K 그 저녁 내리던 빗줄기 그 빗줄기를 따라 후루룩 국수를 들이키던 소리 기찻길 위에 올려 진 녹슨 못 이야기를 하는 동안 상자는 조용했고, 조용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은 담장 따라 걷는 채송화처럼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 병풍이 되어도 좋았다 그렇게 나이 들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상자에게 말했다 상자는 고요했고 세상의 모든 새들은 서쪽으로 날아갔다 사는 게 지겨웠으며 빨리 늙고 싶다고 투명한 새를 보며 말했다 상자의 가슴팍쯤에 오줌 한줄기 갈겨주고 싶다는 생각은 한물간 생각이어서 세상 모든 날카로운 끝에 대고 너도 토끼냐라고 묻고 싶었다 발톱을 감춘 토끼라니, 그 하찮음이 오늘을 또 살게 하는지도 몰랐다 어떠한가, 하찮음으로 밥 먹던 날들 그네를 멈추는 것은 내 몸의 중심 거기에 상자가 있다 투명한 투명한 투명한 새는 왜 죽었을까 얼마나 살고 싶어야 투명해지는 걸까
조연수 시인 / NO 501610*
일련번호로 불리는 내 이름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을 온지 24년 윤기나는 내 몸 위를 달리던 수많은 손가락 콘서트 홀 가득 채우며 영롱하게 건반은 해머를 두드려댔다 내게도 팽팽하게 엮인 줄이 맑고 깊게 소리를 내던 시간이 있었다 광나게 앉아 누구와도 조율 하지 않았던
젊은 소리가 들어오면서 나는 리사이트홀로 분장실로 구석으로 창고로 자리가 옮겨졌다 나를 만지는 손이 없어지고 어쩌다 소리를 낼라 치면 묵직하고 탁하게 쏟아 질 뿐이다
겨우 스물네 살이 된 내가 마디가 꺾어지면서 짧고 저음의 소리를 내고 있다니 아직 연골은 괜찮아 사과를 딸 수 있다고 샹크 어셈블리도 견뎌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누구도 오지 않는 닫힌 문 안으로 어둠뿐이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비로소 떠오르는 덩그런 뼈마디 마디의 감각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오랜만에 숙면으로 빠져든다 하와이 해변 파도소리 들려온다 두두두 녹슬고 늘어진 스틸와이어를 끊는다 뜯겨진 해머와 건반이 떨어진다 가벼운 몸 하얀 아카시 핀 길을 달린다
*501610(일련번호). 1987년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사(社)에서 태어난 최고급 피아노
《포엠포엠》 제1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조연수 시인 / 웃는 뱀
어느 해에는 둑 위를 물뱀들이 가로질러 지나가곤 했는데 바닥에 그려진 자국들을 까르르 웃음소리로 지워버렸지요 그 때마다 머리카락에 뱀꽃이 매달려 집으로 따라왔어요 뱀꽃은 우물 속에서 마루 아래 댓돌 밑에서 쑥쑥 자랐어요 발바닥이 가려워지면 누군가 내 등을 더듬고 손톱을 깎아주고 머리를 땋아주고 동산에 올라가고 그런 밤엔 습관처럼 요동치는 심장에 뱀꽃을 꺾어 비비대며 잠이 들었지요 지루하고 느리게 지나던 시간들 꿈에선 온몸을 끈적이는 혓바닥이 날름거려요 물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웃을 수가 없어요 까르르 소리를 내려고 하면 겨드랑이로 사타구니로 물이 쏟아져 나와요
밤마다 뱀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폈어요 손등에 발목에 잘근잘근 피를 퍼 올려 파란 꽃을 피워대고 있어요 방죽에서 머리를 흔들던 뱀들은 자주 가슴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죠 비늘처럼 미끈거리는 가슴이 봉긋 아파오던 날의 휘파람처럼
조연수 시인 / 나의 왼쪽을 쓰다듬는 일
왼쪽 창틀을 자른다 잘라진 귀퉁이가 비스듬하다 끝나지 않는 왼쪽의 경쾌한 반란 오른쪽은 지루한 기준이 되었다
바람을 맞으며 키가 컸다 달콤했는지 시큼했는지 바람이 지나면 심장은 느리게 때론 빠르게 들썩 자라났다 애매모호한 결핍이 두드러기처럼 번지면 살점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만지작거리는 밤이 여러 날이었다
나의 왼쪽은 뾰족하고 비대칭을 향한 대칭이다 때로 비트 빠른 리듬이 되어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 한 뼘씩 비스듬하고 매력적인 빛깔은 검은 씨를 뱉어내곤 한다 균형으로부터 점점 멀어질수록 더 단단하게 균형을 잡는 나의 비스듬한 왼쪽
자를수록 새로운 왼쪽을 만들어간다 창문을 열자 사과가 쏟아진다 지구를 반 바퀴쯤 날아온 색은 붉은 파랑 익지 않은 편안한 일상이 굴러간다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이라지요 목에 핏대가 툭 불거진 사과의 뼈를 발라낸다 40도로 기울어진 뼈대의 기울기
나는 없는 왼쪽으로부터 다시 사과를 줍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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