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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시인 / 옛우물 옆
한 노파가 앉아 있는 풍경 쪽으로 저만치 집들을 무너뜨리며 폐허가 몰려온다 쓰러진 동네의 잔해처럼 그녀는 헐렁한 우물 옆에서 연신 곰방대를 빨아댄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무엇을 기어이 뽑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인지, 무얼까? 무얼까? 한 곳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쓴 연기를 끊임없이 빨고, 다시 뱉어내고 있다
그녀는 마흔이 넘도록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일, 유일한 생존의 습관을 반복하는 동안 인생이 갔다
더운 햇볕이 한낮을 찍어 누른다 빗살무늬토기 같은 그녀, 반사되지 않는얼굴빛이 누렇게 놓여진 옛 우물의 가장자리, 가물거리는 시간들 끝내 환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바람이 땅바닥을 치며 흙먼지 속으로 숨는다 옷자락은 들썩 가슴을 열어젖힌다 건조기의 땅처럼 쭈글쭈글한 젖가슴이 드러난다 햇볕 아래 더 이상 꺼낼 내용물이 없는 푸대처럼, 남은 습기마저 말려야 하는 듯,좀체로 그 자리를 뜨지 않는다
배용제 시인 / 폐쇄회로
사내는 앉아 있다. 창살 너머 흘러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과 나는 소통이 끊겼다. 생각이 닫히자 말들은 연료가 바닥난 불씨처럼 사그라든다. 불씨만 남은 말들이 입가로 달라붙는다. 킥킥대는 소음의 돌연변이가 된다. 저들은 그 돌연변이에 소름이 돋는지 귀를 막으며 흩어진다. 누구도 내게 소통의 주파수를 맞추지 않는다. 저들의 전달 방식으로는 내게 접근할 수가 없으므로. 나는 편안하다. 소통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여유로움일 줄이야. 편안함으로부터 마구 웃음이 풀린다. 웃음이 끊임없이 목구멍을 넘어온다.
아, 내 안의 생각들은 이제 안전하다. 아무도 생각을 요구할 수 없으며,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귀를 통해 들어온 창에 찔리고, 입을 통해 빼앗겼던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 저들의 생각이 쉴새없이 밀려왔다. 내 안의 회로는 감당할 수 없어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하마터면 내 생각 전체가 사라질 뻔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은 모든 회로를 끊고 문을 닫았다. 그 후 생각들은 상상의 날개를 달고 마음껏 날아다닌다. 두려운 요구나 창살이 없는 세계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돌연변이 소음 킥킥거리는 방어 벽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곳은 안전하다.
사내는 연거푸 웃고 있다. 창살 너머 사람들을 향하여 또는 안전 지대(정신 병동)라고 쓰인 간판을 보며 견고한 창살 안 덩그렇게 앉아.
배용제 시인 / 외과 의사
검은 테 안경의 송은 외과 의사다.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겁이 많던 그가 하필이면 외과를 택했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專門醫. 노련하게 메스를 휘두르는 외과 의사다. 그는 거의 하루에 한 번은 수술실에 들어간다.
소독약이 발라진 배를 거침없이 그으면, 메스 끝 씀벅 전해지는 살의 감촉은 짜릿하다. 향긋한 피의 껍질을 열고 들여다본 내장의 장기마다 체온이 모여 꿈틀거린다. 외부로 돌출되어 거친 동작을 보이던 몸의 구조물들은 마취 주사 한 방에 가지런하다. 그러나 나약한 내부 아랑곳 않는 장기들, 미세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목숨이 되고 따뜻한 체온을 만들어 외부의 구조물들에게 힘을 전달하고 있다. 죽음이 깃들기 전에는 어떤 마취약도 그 가냘픈 힘을 건들지 못한다. 간혹 구석에서 자라는 무서운 위협을 송은 가차없이 도려낸다. 나약한 그것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그는, 오늘도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내부를 더듬는다. 송에겐 거친 몸의 바깥보다 나약한 내부가 친근하다. 자신의 나약함 속에도 가득할 감촉과 향기를 다정한 여인의 살결처럼 어루만진다.
수술이 없는 날, 허전한 일상을 보내기도 하면서 등짝을 대고 누워 잠든 것들을 보면, 송은 배를 가르고 싶다는 충동에 빠지곤 한다.
배용제 시인 / 놀이터에서의 한때
창백한 노을이 지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놀이터에서 잠시, 놀다 정신없이 돌아간 아이들과 하루분의 햇빛을 생각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벤치를 견디는 노인과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일어서는 부인들 어두운 쪽으로만 기우는 나무의 그림자 고딕으로 견뎌온 풍경들을 바라본다 돌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몇 마리 새가 바람의 경계를 넘어갈 때
살아서 어두워지는 것들도 어둡게 살아내야 하는 것들도 제작기 뿔뿔이 꿈의 그네를 흔들어야 할 시간,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물음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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