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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봉 시인 / 길의 배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0.

김도봉 시인 / 길의 배반

 

 

폭설로 깊은 산 속에 갇혔다

갑자기 길이 사라졌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땅속으로 가라앉은 것인가

 

길의 배반

 

나는 길의 배반 앞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길이 없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 사지가 멀쩡한데

이 억제된 생명은

꿈속으로 빠져든다

 

꿈속은 수렁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리는 옴짝달싹 못한다

 

육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죽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육신만 존재하고 의식은 없는 것

눈 속에 묻혀 죽어가고 있다

 

 


 

 

김도봉 시인 / 루이강 또는 알토

 

 

녹슨 배 루아르 강변에

몸 부리고 있다

 

돌아온 집시

 

거친 파도에 얻어맞은 옆구리가 아프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던

강둑 담쟁이 덩굴도

생장점을 멈춘 채 가쁜 숨을 토해낸다

 

음습한 찬 바람에 된서리를 맞아

선실에 내려앉은 마로니에 잎새

갈색 녹이 슬었다

 

루아르강 물결을 타고

늙은 알토의 목청에서 울려나오는

애수띤 선율이

선실 속 먼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쓸쓸함 위에

포개어 쌓인다

 

 


 

 

김도봉 시인 / 파리 지하철

 

 

검은 때가 잔뜩 낀 지하 동굴

퀘퀘한 냄새에 속이 미식거린다

동굴 벽면 여기저기 갈겨 쓴 글씨들

분노와 슬픔이 매달려 있다

 

어디선가 절름거리는 노래가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스쳐오는 목쉰 바람의 소리

피로 물든 안데스 산맥의

아픔들이 출렁인다

검은 눈 검은 머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잉카의 후예들

 

정복자들이 총부리와 전염병으로

사라져 버린 제국

 

지하 동굴 한 귀퉁이

검은 머리 소녀가

 

음악에 취해 며칠째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다

 

 


 

 

김도봉 시인 / 재회

- 의류 수거함

 

 

썰물처럼 빠져나가 썰렁하더니

새로운 녀석들이 계속 들어와 섞인다

평생을 같이 살다가 사별한 노인

한 번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버림받은 숫처녀

몇 달 동안 씻지 않아

똥 구린내 펄펄 풍기는 놈들도 있다

옆집에 살면서도 우연히 마주칠 때

애써 외면한 아주 어색한 사이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두 팔 벌려 서로를 끌어안는다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따뜻하고 정겹다

 

-시집 <길의 배반>, 미네르바, 2021.

 

 


 

김도봉 시인

경북 김천 출생. 포르투갈 어문학 전공(브라질어). 2021년 《월간문학》시 부문 <신인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산문집 『그대는 가을로 온다』. 시집 『길의 배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