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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시인 / 등대슈퍼
달리던 7번 국도가 길을 멈춘다 하늘이 물빛으로 가라앉은 죽산 앞바다 등대보다 집들이 먼저 불을 켠다 몇백 광년쯤 떨어진 눈이 반짝인다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지만 당신은 없고 나만 있다
얼마나 많은 파도를 넘어야 기억의 안쪽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길을 묻기 위해 등대슈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불빛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와서 저마다 몸 안에 감겨 있는 항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굽은 등에 남은 잔광이 희미하다 테이블 구석 엎드려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고 푸르딩딩한 눈두덩이에 아이새도 짙게 그린 여자가 아이 오줌을 누이러 밖으로 나간다
-계간시 전문지 <포지션> 2017년 겨울호
이언주 시인 / 안녕, 바나나
외신에 따르면 바나나 전염병 TR4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바나나가 지구상 에서 사라질 것이다
곰팡이 하나로 멸종하는 바나나 마트 진열대에서 바나나가 없어지고 바나나 맛 단지 우유가 없어지고 바나나는 길다는 말이 없어지고 마트 주인은 빈자리를 채우고 바나나 우유를 찾던 아이는 딸기우유를 마시고 바나나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바나나에게 내일이 없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현대시학> 2016년 3월호, 신작시·
이언주 시인 / 벚꽃 습관
벚꽃에서 화약 냄새가 난다.
벚꽃은 터지면서
허공을 탈색시켜 놓고
군데군데 섬처럼 떠 있다.
얼룩은 구름으로도 충분해서
허공을 가리는 벚꽃을 봄비로 지우는 중이다.
꽃이었던 곳을 맴돌며 목구멍에 핏발 세우는 나는 벚꽃으로 분류된다.
-시집 『처음인 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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