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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산옥 시인 / 녹슨 방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1.

김산옥 시인 / 녹슨 방

 

 

고요가 세상을 집어삼킨 거죠

어둠은 나를 창가로 이끌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내 귀엔

어지러운 바람소리

지친 영혼을 몰아가는

심장소리뿐이죠

뒤척임에 긁히는 숨소리뿐이죠

수명을 갉아먹는

초침소리뿐이죠

 

달이 세상을 사로잡은 거죠

누더기 요때기 뒤집어쓴 거지같은 달이

수챗구멍 안에 어둠을 처넣고 들여다보죠

내 눈엔 달빛 그물에 구멍 뚫은 고양이

움직이는 검은 반죽뿐이죠

빙점 아래를 떠도는

눈 먼 낙엽뿐이죠

아프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무지개빛 별들뿐이죠

 

 


 

 

김산옥 시인 / 병 속의 방

 

 

창백한 밤하늘은

살점이 털린 구름을 갉아먹고요

젖은 가면을 쓴 달은

레이스 자락을 끌고 와

사이프러스 그림자와 춤을 추네요

 

쪼그라든 위장이

나를 깨워

벽에 머리를 찧기 전까지

창턱에 어둠이 매달려 자는 나의 방은

평화로운 달의 둥지

해충들의 호텔

 

그런데 하늘은 왜 자꾸

검은 심장을 열까요?

다친 별들을 꺼낼까요?

창문에서 떨어진 절름발이 별들이

톱니바퀴 삐걱이며 녹을 터네요

이제 내 창자를 통과할 차례거든요

 

 


 

 

김산옥 시인 / 버려진 인형

 

 

네가 캐시미어 이불에 안겨

단잠을 자는 동안

인형은 어두운 공터 귀퉁이에서

비를 맞으며 무거워진다

땅바닥에 치맛자락을 붙들리고

한 시간 꼴로 떨어지는

소주병, 깨진 접시, 잡동사니가 든 비닐봉지가 튀기는

진흙탕을 뒤집어쓴다

감기지 않는 눈동자에

모래 알갱이가 튄다

검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진다

잘못 떨어진 냄비뚜껑이

발목을 찍고 뒹군다

배때기가 바닥에 끌리는 고양이가

빈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입이 벌어지기 전에

짓눌린 가슴에서 소리가 난다

네가 캐시미어 갈피에 들어가

쇼팽의 검은 건반을 틀어놓고

듣지도 않고 자는 동안

 

 


 

 

김산옥 시인 / 복숭아뼈에 고인 노을

 

 

하늘은 왜 붉은 잉크를 빨아먹는가

24개의 사각형, 까진 창살 안에 갇혀 왜

유리창 두드리며 출렁이는가

 

지렁이는 왜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흙이란 흙은 다 갖다 바르고도 왜

몸에 낀 반지를 빼내지 못하는가

 

모감주나무는 왜 뒤늦게 꽃이 피는가

검푸른 이파리들 뒤로 왜

왕관 같은 꽃대를 감추는가

 

달은 왜 벌써부터 나왔는가

곶감 같이 찌그러진 얼굴을 하고 왜

측백나무 울타리를 기웃거리는가

 

나는 왜 개미들의 행진을 쫓아가는가

아무 일 없어도 왜 숨이 막히는가 왜

키스 없는 계절을 내버려두는가

 

 


 

김산옥 시인

1971년 강원도 인제 출생. 본명: 김산옥. 국군간호사관학교 졸업. 간호장교로 복무하다 육군대위로 전역.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 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동시집 『어이없는 놈』 『커다란 빵 생각』 『쉬는 시간에 똥 싸기 싫어』. 제1회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제1회 권태응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