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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옥 시인 / 녹슨 방
고요가 세상을 집어삼킨 거죠 어둠은 나를 창가로 이끌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내 귀엔 어지러운 바람소리 지친 영혼을 몰아가는 심장소리뿐이죠 뒤척임에 긁히는 숨소리뿐이죠 수명을 갉아먹는 초침소리뿐이죠
달이 세상을 사로잡은 거죠 누더기 요때기 뒤집어쓴 거지같은 달이 수챗구멍 안에 어둠을 처넣고 들여다보죠 내 눈엔 달빛 그물에 구멍 뚫은 고양이 움직이는 검은 반죽뿐이죠 빙점 아래를 떠도는 눈 먼 낙엽뿐이죠 아프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무지개빛 별들뿐이죠
김산옥 시인 / 병 속의 방
창백한 밤하늘은 살점이 털린 구름을 갉아먹고요 젖은 가면을 쓴 달은 레이스 자락을 끌고 와 사이프러스 그림자와 춤을 추네요
쪼그라든 위장이 나를 깨워 벽에 머리를 찧기 전까지 창턱에 어둠이 매달려 자는 나의 방은 평화로운 달의 둥지 해충들의 호텔
그런데 하늘은 왜 자꾸 검은 심장을 열까요? 다친 별들을 꺼낼까요? 창문에서 떨어진 절름발이 별들이 톱니바퀴 삐걱이며 녹을 터네요 이제 내 창자를 통과할 차례거든요
김산옥 시인 / 버려진 인형
네가 캐시미어 이불에 안겨 단잠을 자는 동안 인형은 어두운 공터 귀퉁이에서 비를 맞으며 무거워진다 땅바닥에 치맛자락을 붙들리고 한 시간 꼴로 떨어지는 소주병, 깨진 접시, 잡동사니가 든 비닐봉지가 튀기는 진흙탕을 뒤집어쓴다 감기지 않는 눈동자에 모래 알갱이가 튄다 검은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진다 잘못 떨어진 냄비뚜껑이 발목을 찍고 뒹군다 배때기가 바닥에 끌리는 고양이가 빈 가슴을 밟고 지나간다 입이 벌어지기 전에 짓눌린 가슴에서 소리가 난다 네가 캐시미어 갈피에 들어가 쇼팽의 검은 건반을 틀어놓고 듣지도 않고 자는 동안
김산옥 시인 / 복숭아뼈에 고인 노을
하늘은 왜 붉은 잉크를 빨아먹는가 24개의 사각형, 까진 창살 안에 갇혀 왜 유리창 두드리며 출렁이는가
지렁이는 왜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흙이란 흙은 다 갖다 바르고도 왜 몸에 낀 반지를 빼내지 못하는가
모감주나무는 왜 뒤늦게 꽃이 피는가 검푸른 이파리들 뒤로 왜 왕관 같은 꽃대를 감추는가
달은 왜 벌써부터 나왔는가 곶감 같이 찌그러진 얼굴을 하고 왜 측백나무 울타리를 기웃거리는가
나는 왜 개미들의 행진을 쫓아가는가 아무 일 없어도 왜 숨이 막히는가 왜 키스 없는 계절을 내버려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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