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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경 시인 / 불멸이라니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1.

오세경 시인 / 불멸이라니

 

 

이제, 창틀에 매달린 아이비는 늘 싱그럽고

벽에 기대선 해바라기는 시들지 않고

유리병에 꽂힌 장미는 활짝 봉오리를 열어 열정으로 붉으리라

 

화초가 있던 자리에 조화를 놓기 시작한 것도 벌써 여러 해

어느 절정의 순간을 옮겨왔을까

그들에겐 생성에서 소멸까지 저 아름답고도 가파른 길이 없다

문득 소멸을 향한 거침없던 화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한밤의 고요 속에서도 바스락거리며 은밀히 몸을 바꾸어 가던 것들

나는 닦고 있던 선인장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

눅눅한 세면장 한켠을 장식하며 제 토양이 아닌 습지에서 오래도 버티어왔다

그도 지루한 몸을 벗어버리고 싶었던 걸까

누군가의 손에 잘못 건드려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기로 만들어진 그의

몸이 경쾌하게 굴러떨어진다

그가 몇 개의 파편으로 흩어지자 비로소 꼴을 갖춘 한 생이 드러난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저 생명의 본령에 대해 나는 다시 말하리라

예사롭게 그러나 너무 담담하지 않게

 

이윽고, 창틀에 매달린 아이비는 축 늘어지고

벽에 기대 선 해바라기는 서서히 시들어가고

유리병에 꽂힌 장미는 봉오리를 떨어뜨려 빛나던 열정도 퇴색하리라

 

 


 

 

오세경 시인 / 산호, 몇 겹의......

 

 

우연히 알게 되었죠

63빌딩 수족관에서

뜻밖이었죠

 글쎄, 저 산호가 동물이라뇨

당신 상상할 수 있나요?

 밤이면 슬며시 팔을 뻗어

 먹이를 채어가는 산호의 허기를

보세요

 여린 물고기 떼들도 숨어들며

 우-, 산호 숲을 뒤흔들죠

광휘롭지요

 촉수마다 독침을 품고서도

 어찌 저리 눈부시냐고요?

그건 말이죠

 조류라는 식물세포가

 산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래요

식, 물, 세, 포,

 온갖 색을 띠게 하고

 마침내 바다 꽃으로 화하게 하는

호오-,

 당신 맥박 속에도

 식물세포 하나가 숨쉰다고요!

 

 


 

 

오세경 시인 / 부드러운 사람

 

 

제자가 스승께 여쭈었습니다.

“어떤이가 부처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부처지.

”제자가 다시 여쭈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드러움 입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여유롭고 한가하면서도 고요하고 섬세한 것

서걱거리는 것이 모두 제지되어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것

원만하고 원융한 그것이 부드러움이지.

 

”‘당신의 부드러운 말 한 마디

여유로운 발걸음

고요한 마음 따뜻한 미소…

당신은 이미 부처입니다.’

 

 


 

 

오세경 시인 / 그녀는 사선이다

 

 

그녀는 늘 비스듬히 비켜선 채

사물들을 통과하는 직선이나 곡선에게 길을 내어준다

 

그녀는 빗금들을 그으며

그들이 통과해 간 사물들을 빤히 응시한다

 

마침내 그녀의 빗금 안에 사물들이 제 그림자를 드러내면

그녀는 바라보던 사물들을 완강히 지워버린다

 

이제 사물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녀의 빗금에 갇힌 사물들의 그림자가 바로 사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물조차 지워버리고

스스로 빗금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사선이다

 

 


 

오세경 시인

부산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2008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시집 『발톱 다듬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