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순 시인 / 코인로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0.

김지순 시인 / 코인로커

 

 

 나는 C역 B612, 공전궤도를 이탈한 별똥별

 투덜투덜 장미의 외로운 입술을 버리고 불시착했어요

 무한천공의 어둠이 그림자로 따라붙더니

 은하철도 기적소리가 쇠귀를 잘게 저미고 달아나네요

 당신이 떨림 없이 서류봉투 손을, 슬쩍한 손을, 조물조물 엄마 손을, 비아냥 손을, 화들짝 손을, 갈채의 손을 내밀 때마다 나는 곁을 두어요 기억의 수납고 들락거리다 하얀 손 검은 손 놀이에 빠져요 까칠까칠 장미가 문을 열자 감칠맛의 손이 사라졌어요 앙칼진 목소리 둘둘 말아도 성냥을 그어댄 장미는 태우지 못해요 낯을 익힌다는 건 시간을 잊는다는 것이죠 코인, 코인을 잃는다는 거지요 지금은 실시간 당신을 전송해 잔전을 채워야 할 시간

 

 내 상자를 거쳐간 양들이 수채화 속 푸른 대지로 풀을 뜯으러 갔는지 뼈대 굵은 묵화 광장 뒷골목으로 허름허름 사라졌는지 두꺼운 유화 속 비상구 지하로 선대고 갔는지 몰라요 어둠만 격렬하게 켜는 점등하는 양이 보이나요 지구별에 사과를 심을 일 없다는 허무한 양, 돈 세는 일이 취미인 양, 생쥐를 끌어다 볼기를 치는 근엄한 양이 이 험악한 행성에서는 다시 크로키로 현상될지도 몰라요 잠시 손발 맞춰 도움닫기하는 환승역에는 굽 낮은 바람이 불어요

 

 주사위가 던져졌어요 일주일, 한 달까지 함께 잠들어요 단 하나 냄새로 형상으로 내 심장 비밀번호가 바뀌었어요 비취빛 바다 쪽동백으로 물들어요 추락하지 못해 빙글빙글 도는 무기질의 경비행기 암내 풍기는 붉은 여우는 길들여 달라 해안선을 긋네요 바오밥나무에 올라 샛별을 따다 주려는 순간, 나의 장기는 적출되지요 심장은 물결쳐 역사 쪽으로 코인, 코인 어둠의 수라를 들어요

 

 별똥별 왕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신은 찰칵찰칵 소리치며 쇠문을 따고 있지요

 

 


 

 

김지순 시인 / 새

 

 

땅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실금을 본다

검은 하늘 한 홉씩 훔치며

구근의 젖은 날개를 가까스로 털고

슬슬 기어 나오는 새 한 마리

 

 


 

 

김지순 시인 / 시사요리

-햄의 고백

 

 

 사랑은 냉장 보관하세요 실온에 방치하면 상하기 쉬어요 내 곁에 있어도 더듬더듬 그녀의 비컵 가슴을 훔치는 당신 그까짓 피자두빛 발색제가 대수인가요 말랑말랑 삼삼하게 농염한 게 대세지요 자신을 속이지 않은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요? 씽씽 시중에서 퍼온 바람이 쌀쌀하다고요? 눈치 2퍼센트의 당도와 코치 2퍼센트의 염도를 살짝 내려 밑간을 봐요 시간의 얼음상자 안에서 달그네 타고 쿡 별, 별과자 아삭아삭 씹다보면 당신은 어느새 녹아버려요 얼음 소리쳐도 사라져버려요 시시때때 달아나는 당신의 시신경을 위해 산화방지제는 필수아미노산이라고 말해 둘까요 그래도 누군가 손풍금 울리며 내 몸 깊숙이 칼금 그어 손타는 재미 쏠쏠해요 얼굴 팔아 도마 위 난타 장단! 환장이지요 저기, 무서운 악어는 사육사 손끝에서 떨어지는 사랑이 사료네요 돈사 안에서 밀식으로 길러진 내 과거는 언제나 꿀꿀해요 위생이란 깃발 아래 수시로 주사바늘에 찔렸고요 밤마다 당신의 변심이 두려워 항생제로 샤워를 했어요 맨얼굴은 경고? 쿡, 밍밍한 맛은 유죄라네요 비역사적 죄목이 목을 죄고 있어요 산 넘고 바다 건너온 푸드마일 위험고도 높을수록 열두 폭 방부제 치맛자락으로 착착 당신의 선심을 사지요 앉으나 서나 신선도에 첨가물을 듬뿍 버무려 당신 입으로 쏙, 사랑은 냉장보관 하세요

 

―『시인시각』 2009년 가을호

 

 


 

 

김지순 시인 / 포인트 벽지

 

 

 목을 빼고 튜립이 벽을 탄다 붉디 붉은 종이꽃이 벽을 기어오른다 푸른 천창으로 그림자마저 끌고 간다 시간에 뿌리 내린 튜립은 지지 않는다 이웃한 벽에는 수수꽃다리 한창이다 마주봐! 암수딴몸으로 교미 중이다 흐흐 흐드러지게 꽃피는 소리 수수만 점으로 피어오른 먼지는 꽃가루다 투명한 공기의 넝쿨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모서리에 저당잡힌 벽에 발을 뻗는다 캄캄한 말이다 노크를 한다 벽면에 걸린 모자를 클로즈업 한다 깊디 깊은 면벽 중이다 곁눈질 한번 없이 수수방관하는 튜립 오종종 낯익은 발끼리 화환을 엮는다 수수꽃다리 활짝활짝 포인트를 준다 뿌리는 넓고 아늑해 썪지 않는다 어둠이 수수수 떨어지며 우글부글댄다

 

 나라 밖 소식을 전하는 TV 화면,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던 카자스탄 튜립 공원에 폭설이 내렸다 모스크양식의 사원이 눈물을 머금었다 분수대가, 자작나무 숲이, 새집이 순식간에 빙하기로 건너갔다 색색의 튜립 위를 날던 말과 벌도 미이라가 되었는지 모른다 해충도 너끈이 해치웠을 눈 속을 헤친다

 

 벌벌 떨며 말끝을 말아버릴지도 모르는 말벌의 집은 온통 하나, 포인트가 없다

 

 


 

 

김지순 시인 / 향기의 권력

 

 

 울긋불긋 꽃대궐 싸리 흰... 속에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봄날이 저만치 가고 있다 그의 엑스파일 '새콤달콤한 아이스크림향을 찾아라' 이하여백에는 물큰한 단내를 몰고 온 커서도 깜박거리고 있다 로즈마리향이 담긴 램프를 켠다 기억 속에 수천의 향 빽빽이 수납된 그는 조향사다 병을 하나씩 꺼낸다 뚜껑이 열릴 때마다 꽃잎이 날린다 열매가 씹히고 혀끝에서 저마다의 이름이 드나든다 청포도에 풀 냄새 섞어 완성한 부재의 향기, 세상을 유혹한 알로에향 이미지에 반짝,

 

 풀 냄새 피어나는 ...한때의 유행처럼 퍼지는 향수일지라도, 누구나 키스하고 싶은 톡톡 튀는 향을 디자인해야 한다 일단 불러낸 향료에서 후각과 미각을 달군 경우의 수를 꺼낸다 부드러움에 감긴 만큼 물로 섞고 불로 가열한다 우무처럼 엉기거나 끓어오르다 휙 날아가버린다 어디서나 미적거리다간 때를 놓쳐 산화될 공산이 크다 항시 꿈틀거리는 우연의 틈새에 촉수를 드리워야 한다 앞서 간 발자국에도 기웃,

 

 그 속에서 놀던 때가...이름 모를 들꽃에도 기웃거려야 한다 그의 기호는 탱탱볼처럼 튕겨나가 벽이 없다 그들보다 먼저 튀어올라 이미지의 향을 깔아 놓아야 한다 커서는 개코 임을 자랑하는 그를 믿는다 반향을 몰아오고야 말 이하여백... 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향기는 휘발성을 기화로 살아나고 있다

 

 


 

 

김지순 시인 / 자귀나무가 귀의하는 방식

 

 

햇살 기어다닌 잎사귀 위로 천 개의 귀를 연 자귀나무

귀에 못 박힌 개구리 신방 울음소리로 생리혈은 터지고

가녀린 꽃술마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안보살도 앉아있네

분홍빛 눈이 분홍빛 귀가 된 야합수 꽃구름 속으로

수없이 순한 별이 뜨고 게으른 며느리 못 본 초승달이 지고

청소골 빠져나온 낭만고양이 갈참나무 숲으로 들어가네

합장하던 손으로 신권의 신사임당 얼굴 세는 소리를 얹고

장맛비의 숱 많은 머리카락 세는 소리도 귓밥으로 앉혀두네

 

저 아래 개구리밥 둥둥 떠다니는 푸르디푸른 연못에

팔뚝만한 잉어는 수심 깊은 그늘을 짊어지고 있네

백주에 잠든 소쩍새의 잠덧에라도 말더듬이 세워

솔쩍 솔쩍 흩뿌려진 눈물을 밥물로 잡아 안치는 소리

약대 잡던 귀가 얇은 남자 집으로 들어서는 소리

착착 귓바퀴 안으로 달디단 기도를 감아올리는 저녁

어둠은 골목 귀퉁이에서 피어올라 아이들 베갯잎에 스며들고

꼭꼭 눈 감은 아이들 얇은 잠 밟고 뛰어내린 꽃이파리들

귀 빠진 수면 위에서 연밥을 먹으며 말을 걸고 있네

 

귀밝기 어둠 먹은 자귀나무 이파리는 천 개의 잠귀라네

 

 


 

김지순 시인

1960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2007년 《시에》를 통해 등단. 《시에》 작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