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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정 시인 / 의사소통
출근길 신호 대기 중 도로 옆에 노란두건 구겨 쓴 할머니가 구부러진 허리 들며 손등을 위 아래로 휘휘 흔든다 손등 가리키는 방향엔 늙은 똥강아지 한 머리가 갈팡질팡 오줌만 지리고 있다 할머니께 다가가면 할머니가 소리치고 도망가려하면 할머니가 손짓하고 똥강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낑낑대고 있다 이놈아, 위험하니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니까 손 내저으는 할머니의 속 뜻을 똥강아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이규정 시인 / 컵라면증세 -우울증
유리 식탁에서 컵라면을 먹는다 내가 스프링을 먹고 있다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진 스프링의 맛 링의 탈력에 따라 얼굴 화색도 다르다 구불구불 팔다리 구분 없이 뒤엉킨 라면 머리가 어디에 꼬여 있는지 나선형으로 뻗어있어 끝을 찾을 수가 없다
끝없이 꼬여 있는 맛 내가 꼬여있는지 나는 모른다 컵라면이 되어 있는 동안은 우울하지가 않다 꼬일대로 같이 꼬여주며 웃어주는 그렇게 치료하는 의사는 없나? 스티로폼 비닐 성분에 갇혀 있다는 것 그것은 내 취향이지 사랑이 다 뭐야 뚜껑을 덮고 종일 중얼거리는 구부러진 맛 면이 촘촘할수록 일품이지 뚜껑이 약하게 덮어져있지만 열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나를 가두고 있는지 나는 몰라 구부러진 스프링의 맛
처음, 의사에게 우울 증세를 말하였을 때 컵라면 증세라고 첫마디 떼는 순간 킥-웃음을 보이더군!
어떤 맛인지 먹어나 보았겠어! 치료한다고 더 구부러뜨려 놓는 말들 컵라면이 되어 내가 나에게 다시 물을 붓고 나를 또 끓여야 할까 봐
이규정 시인 / 죽음을 닦아낸 개
들판에서 쥐약을 먹고 돌아온 개 마루 밑 가장 어두운 곳에 뛰어 들어가 어둠을 펄떡뛰게 만든다 하얗게 뒤집어진 눈 구석이 닳도록 숨을 몰아쉬던 기억
입을 벌리고 먹인 비눗물 한 바가지 뱃속에 고였던 죽음 울컥하고 올라왔던 기억
구석으로 모이게 했던 눈동자들 비명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두근거리며 박혀있다
비눗물 먹고 깨끗해진 개 한동안 으르렁거리며 꺾이지 않았던 그 야성도 닦였는지 온순해졌다
술만 먹으면 뒤집어졌던 기억들 아버지에게도 먹이고 싶었던 그 비눗물 한 바가지
- <미래시학> 202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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