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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곡 시인 / 바다
바다는 세상의 끝을 담기 위해 넓다
바다는 세상의 상처들이 다 모여 시퍼렇다
바다는 제 몸을 깎아 주고 빈 껍질만 남았다
바다는 보고 싶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는다
이병곡 시인 / 바람, 보이지 않는 인격
칠일 동안의 창조물을 빼고 세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 바람이다
근육만 있는 세상에서 뼈가 많이 생겨나는 건 진화의 비극이다 언제부턴가 세상에는 뼈 없는 것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고 뼈 없는 것은 평생 엎드려 사는 하등생물이나 뼈 있는 것의 보조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세상에는 근육이 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살고 정형화된 것만이 대접을 받는다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자신의 뼈를 빼내어 부정형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뼈가 되지 못해 좌절하고 분노하는 세상이 되어 간다 중앙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뼈가 되고 규격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정형화된 세상은 빈 곳을 만들고 사각지대를 만들고 허전함과 거리감과 배고픔과 명암이 생겨난다 그 곳을 채우기 위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바람은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한다
유형의 존재는 무형의 존재인 빛과 바람에 의해 드러난다 빛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으나 세상은 바람에게 진 빚을 계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계부에도 인생의 계산서에도 바람의 임대료는 없다 바람에게 진 빚을 갚고 나면 모두 적자 인생이기 때문이다 뼈도 근육도 아닌 바람이 세상을 지고 공중에 떠 있다
바람이 되어야 한다
이병곡 시인 / 어름산이*
고추달린 금줄 위에 새끼 참새 한 마리 콩콩 뛰고 있다 듬성듬성 빗방울이 떨어진다 살판이 내리막을 치고 작수목을 세운다 왼 새끼로 꼰 9푼의 줄 위에 두발을 올리니 고추가 팽팽히 일어선다
왼발로 디디고 오른발로 허공을 박차니 연산군이 쏜 화살을 피하다 떨어져 굽은 무릎이 경복궁 용마루에 얹힌다 구중의 세상을 훔쳐보다 황급히 내려오니 칠성판 줄이 늘어져있다 유랑하는 혼들이 작수목을 당겨 생멸의 줄을 조여준다
공길이*를 들쳐 업고 궁궐을 빠져나가야지
오른손 부채로 연산의 눈을 가리고 왼손으로 용포자락을 힘껏 찢는다 순간, 구경꾼들 가슴이 싸늘해진다 매호씨란 놈이 슬슬 부채질을 한다 - 어름산이 형님이 저래도 나라님 머리 위에 노는 양반이여 얼씨구 -정승댁 맏아들이 오면 양반병신걸음 하거라 "오오냐 - 양반님네도 엄마 배에서 줄타고 나오지 가마타고 나오나 그렇고 말고 술에 취한 드잡이꾼들이 멱살질을 한다 광대 꿈꾸던 어름삐리 때가 엊그제 같다 굵은 빗방울이 낙엽처럼 흩어지고 모두 어디론가 돌아간다 사타구니에 힘을 모으고 다시 용솟음을 친다
*어름산이 줄타기 재주꾼(출광대) *공길이:연산군 때의 실존 인물(배우)로서 왕에게 직언을 하다 유배를 갔다
이병곡 시인 / 제사의 고별식
술잔을 올리는 아버지의 손이 천 근 같으시다
아부지 지가 죄인입니다. 조상님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바나나 키위 파인애플....., 죽은 사람은 영문도 모르는 과일들이 낡은 제사상에 투박하게 올라 와 있다. 반신불수가 되신 어머니는 며느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 한 자책감에 연신 눈물을 훔치신다.
다달이 닥치던 봉제삿날 아버지가 제수를 장만해 오실 때까지 불안한 날을 보내야 하는 없는 집 종부에게 지워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유산이 막을 내린다.
주과포만 올려라, 할아버지는 뒷날을 예견한 듯 아들 내외의 짐을 조금이라도 들어주려고 하셨다지만, 조상의 음덕을 확실히 믿고 계시는 할머니는 혼령을 굶길 수 없다고 끝내 어려움을 모른 체하셨다.
아부지 마지막 한 술 뜨시고 내년부터는 오지 마이소.
마당까지 잡초처럼 늘어서 있던 제관들이 민들레처럼 흩어진지 오래다. 신주를 태운 불똥이 유성처럼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마음이 새벽 찬 서리처럼 선뜩하다.
이병곡 시인 / 엘리베이터에게
바벨탑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고 있음을 당신은 아는가?
더 높이 올라 자신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은 히말라야 계곡 속의 날개 없는 생물들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세상은 인간의 속도가 아닌 자연의 질서에 의해 나아가고 자연은 순응과 조화라는 뚜렷한 철학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네. 물과 산이 분담해 온 수평과 수직의 평화가 당신으로 인해 파기되고 있음을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수평의 너절함을 간결하게 토막 내어 쌓는 수직의 우아함 선사시대 움막을 짓는 것보다 더 쉬운 고층기술의 우월성
그렇게 빚어 낸 작품이 감탄할 만 해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꼭짓점 하나에 불과하다네.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희소적 가치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가. 그것이 인간다운 삶의 퇴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네. 공중이 디딤이 되고 목적이 되면 신체의 변형과 수직정렬의 문화와 언어의 사다리가 생겨 날 걸세. 이 모든 게 당신이 세상을 경제성과 편익성으로 바라보는 자본가들의 논리에 동조하면서 발생한 것이네.
9.11사건*을 벌써 잊었는가, 당신은 그 많은 사람을 싣고 올랐지만 얼마나 모시고 내려왔는지 상기해 보게. 이러다가 수평의 반격이 시작되는 날이면 세상의 미래는 없다네. 무거운 짐을 지고도 아직은 침묵하고 있는 땅에게 더 이상 인내를 강요해서는 안 되네.
부디 당신이 가진 특별한 재능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사용해 주게.
*9.11 : 2001년9월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 등이 테러에 의해 무너진 사건
이병곡 시인 / 호모사피엔스의 마지막 미이라
루시*, 인류 최초로 외로움이란 병에 걸려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외딴 동굴에서 미이라가 되었다가 세상으로 나왔다
동굴 밖을 응시하고 누워있는 키가 조그만 소녀의 슬픈 눈망울을 들여다보니 외로움은 인류의 죽음에 닿아 있다
지하 보일러실에서 발견된 어느 노인의 백골과 단칸방에서 몇 달 만에 발견된 처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다 지쳐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꿈꾸어야 하는 세상의 반대편으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집단의 바깥쪽으로 몸을 돌리는 건 외로움이 아니다
수백만 년 후 차가운 벽 속에 눈물이 사라져 버린 호모사피엔스의 쓸쓸하고 희미한 눈동자
황급히 돌아눕는 나의 미이라
*루시: 1974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에게 붙인 이름. 약350만 년 전 인류 최초 조상의 한 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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