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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화 시인 / 분노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그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재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야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 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윤진화 시인 / 그렇다고 우리를 데려가실 건 아니잖아요
초원의 코끼리는 똥 무더기에 긴 코를 박고선 쩍쩍 갈라진 발바닥의 가뭄을 아파하고 있지요
썩어가는 상아 노려보며 장총을 든 사냥꾼이 연발사격 준비를 끝냈는데도 우두커니 서 있지요
사바나에서 태어난 코끼리 가네샤 신의 영험이 지전(紙錢)을 들고 파르르 이승을 지켜보고 있지요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부르짖는 닭, 하얗고 긴 꼬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지켜보지요
코끼리 발목에선 가시덤불이 자라고 버드나무 아래에선 빈 탄환이 굴러다니고
늙은 신을 향한 총성이 들리고요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는 코끼리와 피 칠갑 날개 퍼덕이는 닭이 서로 부둥켜안고 쓰러지고요
코끼리 발바닥처럼 신과 인간의 주술관계 쩍쩍 갈라져 굳어가고요 썩은 이빨도 눈길에 쓰러지고요
윤진화 시인 / 동백꽃
오필리어가 간다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 간다 칼춤 추던 사내에게 두들겨 맞은 뺨 벌그레하던 년이 간다 멍든 젖가슴 부끄러운지 모르고 자꾸 열어 보여주던 그 년이 간다 칼등에 날세워 자른 듯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린 독한 년,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내던 질긴 년, 冬 - 冬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꽃잎 벌려 웃으며 간다 노란 중심 발기한 몹쓸 년이 저기, 저어기,
…… 시끄러워라, 동백,
윤진화 시인 / 아줌마를 위하여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그자. 칼을 긋고 벌린다. 은밀한 속살에서 원시림의 향기가 살아서 살아서 다른 몸으로 전이된다. 이 참을 수 없는 원죄를 꼭 붙들라, 누군가 성호를 긋고 있다. 배추를 벌리고 소금을 넣으며 떠올리는 야릇한 경계, 신을 모방하는 손길. 대개 배추는 속부터 간이 들어야 제 맛이다. 신은 내 머리를 벌리고 밀어 넣는다. 채 썬 무, 엇비슷한 키를 가진 갓을 섞어 밀어 넣는다. 대개 본연의 형태를 저버린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속을 더 꽉 채운다. 그렇다. 그렇다 치자. 사내인 당신이 나를 가르고 내 속을 채우던 날을 기억하자. 그 속에 매운 고추, 파,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은 신도 알고 나도 안다. 가끔은 달콤한 과일을 넣는다. 혀를 속인다. 몸을 속인다. 익어가는 모든 것들은 맛있다. 알맞게 간이 밴 내 몸과 또 다른 배추를 찾으러 시장을 기웃거리는 신처럼, 우린 맛있게 익을 권리와 의무가 있는 김치를 담근다.
윤진화 시인 / 모란
1. 보인다, 책을 펼친 사람에게서 향기가 들린다 안타까워하지 않고 눈 밝혀 바라본다 읽고 또 읽는다
꽃이 질 때까지,
2. 어떤 꽃은 향기가 없어요 그 말은 거짓말이죠 아니요, 일부러 향기를 내지 않아요 아니요, 향기가 없는 책은 없습니다 향기가 없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이죠 그래요, 함부로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닮은 상처를 보여주기 싫을 겁니다
― 가끔 문장에서 그 꽃, 향기가 나요 그 말은 거짓말이죠 아니요, 그 향기를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요, 그 향기가 소리로만 들리나요 향기를 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말은 참말이죠 그래요, 그 사람이 내내 잊히지 않아요 그래요, 당신의 상처가 그 꽃, 향기로 피는 겁니다
그때 왜 활짝 핀 상처를 들켰을까
3. 그 책을 펼치면 질 때까지, 하루가 일 년 같다 향기 없지 않은데 향기 없는 것으로 오해를 보내고 찾아오는 사랑 없지 않은데 사랑 없는 것으로 오해를 얹는다 냄새와 향기를 구분하는 사람과 다시 오해를 보내고 중심 가운데 비켜선 채로 활짝 피어 또다시 오해를 더 했다
윤진화 시인 / 21세기 마녀 되는 법
옆집 사내가 쓰레기봉투 버리듯 계집을 던진다. 복도에선 옆집 가계(家系) ㅡ계집의 머리채를 잡는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 맷돌 같은 시멘트 바닥에서 계집을 돌린다. 짓이겨지는 계집, 조금 젊어 보이는 여자가 빗자루로 계집을 후려친다. 우리 집안으로 스며들어 숨을 곳을 찾는 계집의 피 섞인 소리 ㅡ잘못했어요, 어머니, 잘못했어요, 애기씨, 자진모리가 구성지다. 계집의 잘못이란 사내의 숨겨둔 여자를 만나 헤어져달라, 하소연한 일이란 것을 아는 나, 감시창 달린 현관문을 연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계집, 살풋 벌어진 옷섶을 가린다. ㅡ13층 아파트 난간에서 튕겨나간 계집, 두둥실 검은 하늘을 난다. 노란 보름달에 걸린 계집, 보습학원에서 돌아온 옆집 꼬마가 112에 전화를 한다. 우리 아파트에 마녀가 살아요. 우리 엄마가 마녀였어요. 그 찰나! 잘못했어요. 라는 주문이 틀렸는지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하는 마녀와 빗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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