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광석 시인 / 폭염주의보
내일 오후 폭염이 덮칠 것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껴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의 열기로 사랑이 뜨겁게 달아오를 거라는 미친 생각은 하지 마시고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변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열기 가득한 야외에서 데이트는 서로의 사랑이 녹아내릴 우려가 있으므로 가급적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집 안에서는 냉전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좋으므로 정다운 대화는 그치고 에어컨 리모컨은 가급적 선점하시기를 권합니다 외출 시에는 길 위에 뜨거운 온도에 녹아 버린 연인들이 흐르고 있으므로 주의하여 걷기 바랍니다 서로의 눈빛이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거우면 엉겨 붙지 마시고 바다가 보이는 해변 술집에 앉아 얼음 탄 생맥주 정도만 붙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에서
오광석 시인 /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루이스캐럴)
모자장수는 미치광이지 고부라진 혀로 나는 보잘것없는 모자장수에 불과해*
고장난 시계를 보며 차를 마시네 어제와 다른 시간에 어제와 같은 시간을 보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네
시간은 되돌아가지 쓰다 쓰다 돌아봐도 변하지 않는 시간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들 시계바퀴 속에 갇혀 살아가는 샐러리맨 귀를 길게 늘려 쫑긋거리며 살아가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네모난 파티션 속에 앉아 두 눈이 충혈 되도록 네모난 모니터를 바라보지 사고 접수지만 줄줄 뱉어내는 복합기와 민원인의 고함만 토해내는 전화기 사이 미쳐 가는 샐러리맨 미치광이 모자장수처럼 고장 난 시계를 가지고 있지 똑같은 시간에 로또줄을 서야해 기적이 일어나면 반복되는 고장 난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 불가능한 걸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하다고 믿는 거야*어제 같은 오늘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차를 마시지
고장난 시계를 보며 차를 마시네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고장난 시계라도 좋아 반쯤 미쳐 살아도 좋아 내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 나는 행복으로 할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대사를 일부 차용함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에서
오광석 시인 / 모기영화관
머릿속에 모기가 산다네 윙윙 울리는 소리가 들리네 두개골 안쪽 대뇌를 자극해 심연 깊은 장면들을 들춰내 필름이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네 감은 눈꺼풀 속에 영사되는 장면들 사라져버린 탑동 바닷가 보말을 줍는 아이들 흐릿한 흑백영화 같은 시절 탑동 파도처럼 잔잔한 미소가 흐르면 다시 모기가 날아 머릿속 한 장면을 꺼내네 어린 첫사랑의 목소리 새벽 벤치에서 나눈 속삭임이 들리네 이어폰으로 듣는 FM라디오 소리처럼 머리 한가운데서 윙윙 울리다 커지면 신기한 새 생명의 소리 앙앙 우는 작은 요정을 황홀하게 바라보네 모기는 지난 추억을 찾아내는 청부사 대뇌 감정을 자극하는 모기의 수작질에 나는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도 지난 시절을 다시 느끼네 윙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난날들이 영화처럼 다가온다면 머릿속에 모기 한 마리 더 키워도 좋네 두 귀 사이를 오가며 내 남은 젊음을 빨아먹어도 좋네
오광석 시인 / 시베리아행 열차
롱코트 정장을 보며 쇼윈도를 기웃거리다 헐렁한 청바지에 파카로 몸을 감싸던 스무 살 즈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베리아의 공기를 몰고 와 폐 속을 헤집고 나왔을 때 그곳을 동경하게 되었다 지나치면 잊어버리는 짧은 단상들 마흔을 향해 달려가다가 떠오르는 스무 살의 겨울은 열차가 중간에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같은 거 역에 앉아 시베리아행 열차를 기다리던 나는 바람을 타고 오는 기적 소리에 동그란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칼바람 아리는 도시를 뒤로하고 가보지 못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삼등 열차 구석 자리에 앉아 일생을 꾸벅꾸벅 졸고 싶었다 황혼 즈음에 도착하는 하얀 초록의 시베리아 포근한 오두막에 누워 써먹을 데 없는 지폐들을 불쏘시개 삼아 잠들고 싶었다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짓다가 익숙한 경적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면 지나쳐버린 간이역 같은 단상들 스무 살에 간절했던 롱코트 정장을 입고 꾸욱 눌러 담은 서류 가방 둘러매고 매연 날리는 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다가 지나쳐가는 도시인들의 무관심에 쫓기듯 벗어났다
-시집 <이계견문록> 천년의시작
오광석 시인 / 스팸의 하루
빽빽한 건물들 사이로 가는 햇살이 원룸 창문으로 눅눅하게 들어오면 오늘도 어제처럼 가공된 하루가 시작돼요 축축하게 세수하고 저렴한 스킨 내음 풍기는 매끈한 얼굴로 도시로 나가요 반듯한 사람들이 건물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게 반듯하게 가공된 스팸들이 프라이팬과 레인지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죠 풋풋한 파처럼 생감자처럼 사로 싶었지만 네모난 스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난 구석은 다 쳐내고 네모나게 만들어져 대량생산되는 하루여 매끈한 몸으로 하루를 살아가다 달궈진 해가 꺼지면 프라이팬 같은 사무실에서 튀겨져 나와 물렁해진 채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 썰리는 우리 살 내음 풍기며 유혹하던 시절 생고기처럼 붉어진 얼굴로 만난 우리 가공되어 튀겨진 채로 포장마차에서 찬 소주와 함께 섞이고 나면 잠시나마 생생한 시절로 돌아가 씹히는 맛 스팸의 하루가 저물어가요
오광석 시인 / 따뜻한 북극해
가끔 북극항로를 여행하네 하루가 고단하고 지칠 때 시린 바다로 떠나는 거야 그리 어려운 건 아니야 깊은 동해를 거슬러 올라 사할린 섬 꼭지에서 동쪽으로 오호츠크해를 건너야해 캄차카반도 남쪽 끝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륙과 대륙 끝이 만나는 베링 해협을 지나지 정북 방향으로 키를 잡고 항해를 하다 보면 마주치는 부서져 떠다니는 거대한 빙하 둥둥 떠다니다 녹아 사라지는 얼음들을 헤쳐 항해를 하네 그리 춥지는 않아 북극의 바다는 사고 접수지가 쏟아지는 재난 같은 하루 일과를 끝내고 드러누워 바라보는 북극의 바다는 사방이 막힌 원룸 같은 배 안에서 노곤한 항해사는 항로를 탐색하다 잠이 드네 긴 항해의 날들을 꿈꾸는 밤의 항해사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동재 시인 / 보름달 외 6편 (0) | 2025.08.12 |
|---|---|
| 김원옥 시인 / 아픈 세상 외 5편 (0) | 2025.08.12 |
| 윤진화 시인 / 분노 외 5편 (0) | 2025.08.12 |
| 이병곡 시인 / 바다 외 5편 (0) | 2025.08.12 |
| 김유섭 시인 / 산책 외 5편 (0) | 2025.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