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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예영 시인 / 산책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홍예영 시인 / 산책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홍예영 시인 / 우이동솔밭공원

 

 

백년 묵은 천 그루 소나무가 방하착하고

기인 하안거에 들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무속 결 따라 신들의 궁전으로 가는 길

울려나오는 금강경의 물결도 숨죽이고 흐른다

수천수만 개의 푸른 붓으로 비경秘經을 새기고 있는

노스님의 먹물은 말라붙어 버렸다

땅속 천 길 이엄이엄 흐르는 천의 냇물이여

내 마음의 다랑논에 물꼬를 열어 다오

바람의 땅 낮은 곳을 따라 흐르는 온전한 물소리

잠깬 물고기 한 마리 날아올라

천년 세월을 면벽하고 나서 쇠종에 매달리니

바람이 와! 화엄華嚴의 춤을 춘다

무거운 침묵으로 빚은 야생의 시편들

눈 밝은 이 있어 저 바람의 노래를 읽으리라

귀 밝은 이 있어 저 춤을 들으리라

마음 열고 있는 이 있어 물처럼 흘러가리라

저들 나무속에 숨겨진 비경을 나 어이 독해하리

잠깐 꿈속을 헤매던

속눈썹 허연 노스님이 땅바닥에 말씀을 던져 놓자

시치미를 뚝 떼고 있던 소나무들

몸 전체가 붓이 되어 가만가만 하늘에 경을 적고 있다

잠 못 드는 비둘기 떼 파닥이며 날아오르다

소나무 주위를 푸르게 푸르게 맴돌고 있다

북한산이 가슴을 열어 다 품고 있는 것을 보고

구름장 하얗게 미소 짓고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이윽하다

좀 좋은가.

 

 


 

 

홍예영 시인 / 침묵 1

 

 

침묵만한 말이 세상에 없다

바람이 울지 않듯,

나무는 한평생 말을 사약으로 삼키며

살아서 꽃을 세우고

죽어 침묵을 내려 놓는다

우리의 말도 꽃처럼 허허로울 때

말은 열매를 허공에 단다

그 열매가 침묵이다

맹목 같은 시의 침목이 된다

침묵은 천년 묵은 침향이다.

 

침묵은 보석처럼 빛난다

침묵은 호수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말로도 못할 일이 있다

완전한 불완전,

그것이 시의 절대자유, 생명이요, 꽃이다

시에는 침반이 없다

가는 길이 천양지간 사방이다

시는 침묵이 피우는 맹목의 꽃

그 열매가 향기로 너에게 간다

맹물의 시다.

 

 


 

 

홍예영 시인 / 참나무 그늘

 

 

그가 단상에 앉아 있을 때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보였다 한다

한평생 시만 덖고 닦다 보니

육신 한 장 한 장이 책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 말씀마다 고졸한 영혼의 사리여서

듣는 이들 모두가 귀먹었다 한다

자신이 쓴 시를 스스로 풀어내자

강당 안은 문자향文字香으로 그득했거니와

몸이 뿜어내는 서권기書券氣로 저녁까지 환했다 한다

평생을 시로 살았다면

말씀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한다

그는 평생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온 낙타였다

길고 허연 눈썹 위에는 수평선이 걸려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달빛처럼 흘렀다 한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자

먼지 한 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울 듯 요란했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마쳤을 때

방안에는 오색영롱한 구름이 청중 사이로 번졌다고 한다

그의 시는 오래된 참나무 그늘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친 걸음을 쉬고 있었다

주변에는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한다.

 

 


 

 

홍예영 시인 / 집을 수리하며

 

 

늦은 가을날

유방도 심장도 자궁도 다 버린

앙상한 몸 퀭한 가슴에 찬바람이 와 젖는

폐허에 배를 대고 십팔 박十八泊을 했다

나도 집처럼 금 가고 이 빠진 늙은 그릇

한평생 채웠어도 텅 빈 몸뚱어리였다

집도 비어서야 비로소 악기가 되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노랠 부르고

비 오는 밤에는 거문고 소리로 울었다

 

달밤에도 잘 보이던 것들이

창문을 다 떼어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굽고 꺾이면서 틈새를 날리고

집은 얼마나 많은 곡曲과 절折을 염장했을까

하잘것없는 것들!

쓰잘데 없는 것들!

보잘것없는 것들!

 

버리고 비워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오래된 집을 위하여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질곡桎梏에 매이고 있는가

30년 만에 집수리를 하면서.

 

 


 

홍예영 시인

1953년 전남 나주 출생. 연세대학교 불문과 졸업. 동국대 문창과 졸업. 2000년 계간 『시와시학』 등단, 2003년 시집 『그런데 누구시더라』 출간. 산문집 『상신리 가는 길』 『코망코망』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