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춘순 시인 / 화장법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14.

김춘순 시인 / 화장법

 

 

누구에게나 화장법이 있고 전생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각자의 화장법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첩을 두드린다.

얼굴의 움직임 따라 기억되는 화사(華奢)의 뒷면에는 미래로

부터 온 별자리가 지도처럼 그려져 있다

 

‘이름과 생일과 좋아하는 숫자를 알려주시오.’

 

두드린다는 것은 들어가는 좌우의 불을 밝히는 것, 바람을

누그러뜨려 문을 여는 것이며 전생을 기억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겨울의 첫째 달부터 넷째 달까지 당나귀 젖 마사지가 끝나는 몇

생을 지나면서 가장 동경하는 얼굴을 상상한다.

 

서양 어느 마녀의 화장법엔뒤뜰의 그늘을 바르고 그날 처음 본

얼굴을 빼앗거나 훔쳐 바른다고 한다. 불안한 눈매는 불안한 눈을

빼앗고 비스듬한 뺨의 색깔은 기울어진 마음을 빼앗는 화장법으

로 간직 했다고 한다.

 

이 화사의 상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분장하기도 하고 치명적 자

존심을 치유하기도 하는 독법이 있다. 매끄럽고 화려하게 그려진

전생은 늘 낯선 곳을 여행한다. 가장 동경하는 것은 지금의 내 얼굴,

나는 이 낯선 얼굴이 좋다.

 

화장을 끝낸 분첩 ‘딱’소리 내며 전생을 닫는다.

 

<2012 열린시학 겨울호 '오늘의 시인' 특집 게재>

 

 


 

 

김춘순 시인 / 여울을 닮은 물고기

 

 

수많은 물의 줄기들이 흘러간 바닥

소리와 풍경은 고여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여울 속 매끈거리는 것들은

귀가 어둡다

가벼운 것들은 가라앉지 않았고

거슬러 지나가되 머물러 살지 않았던 곳

투명하고 납작한 버들잎 몸체가 하늘거릴 때

바다 속 모래구멍에 몸통을 숨기던 습관을 기억했다.

 

여울을 닮은 물고기

꼬리로 바닥에 길을 낸다.

바닥을 끌고 가는 매끈거림에는 어지러움이 있고

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유선은

물결을 유리처럼 닦아 반들거렸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온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던 습성, 물살을 물고 물살

속에서 버티기도 했던 그믐밤이 있었다.

 

물살만큼 촘촘한 것도 드물다.

그 물살 하나하나를 펴고 다시 엮어 만든 통발

입구는 좁고 통로가 넓었던 물고기의 길

대나무를 엮어 부채꼴로 벌려 놓고

말뚝과 말뚝 사이 얼기설기 엮어 놓은 날개그물에 파닥거리며 구불거리는

것들 걸려있다

죽방렴 간질이던 방향을 잃은 무늬

뜰채로 냉큼 건진 자리에

이빨 자국이 선명한 물의 흔적이 있다.

 

<2012년 열린시학 겨울호 '오늘의 시인' 특집 게재>

 

 


 

 

김춘순 시인 / 염소

 

 

선미船尾의 멀미가 접안接岸에 든다.

 

배에서 내려 결절된 염소의 울음소리를 따라 간다.

묵묵히 겨울을 끌고 온 동백은 붉은 색깔이 무겁다.

늙은 섬, 늙은 水平線은 염소의 눈에 낮잠으로 든다.

 

늙은 염소의 뿔엔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섬에 앉았던 바람,

쉬어 간 바람의 횟수만큼 뿔에 새겨진 눈금들

바람이 들었다 빠져나간 자리인 듯 풀들은 모로 누워 있고

뿔들은 모두 빗어 넘긴 방향을 하고 있다.

 

미간이 접히듯 파도가 접히는 오후

홍채虹彩가 열리는 시간,

섬의 모든 시간들은 수평선으로 달려간다.

 

섬의 울음들이 단절 음으로 실눈을 뜨고

한 번의 돌진을 위해 칼날 같은 角을 세우는 他地의 바람들,

그럴 때 마다 수염은 조금씩 자라 슬픔 을 쓰다듬었다

 

울음에는 접안接岸이 없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오후를 지나면

 

섬의 둥근 어둠이 만수위에 든다.

바다를 떠돌던 어둠들이 섬에 모여들어 캄캄하다

염소의 뿔은 달빛 아래서 굽어지고 있고

붉은 동공에 흰 달이 태연하다.

 


 

 

김춘순 시인 / 화농의 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들을 상처가 내려다보고 있다

 

꽃들이 다래끼를 앓고 있다

납작한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은 눈썹

발돋음 하던 봄이 와르르 무너지면

눈썹이 묻어 있던 곳마다 꽃들이 진다

 

꽃의 입술, 바람을 물고 있는 떨림

가장 늦게 돋아난 가장 깊은 것들이 깜빡거리고 있다

꽃잎의 요의가 불편하듯 흔들려

봄의 內衣를 서둘러 내리듯 눈썹 몇 개를 뽑는다

 

퉁퉁 부어오른 나무의 화농을 짜내고 있는 꽃송이들

먼 곳의 꽃들이 더 연연하다

두꺼운 겉옷의 언덕을 넘어온, 제 색을 다 채우지 못한 눈 끝의

開花

소보록해진 눈꺼풀에 발기되는 봄

 

꽃이 피고 지는 밀실은 아무도 본적이 없어

가장자리만 붉었던 입술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어깨위로 툭 떨어져 버린 꽃

 

中心을 놓친 무게는 씨앗을 키운다

떨어진 꽃들이 혼자이거나 혹은 여럿이거나 떨어진 자리에는

딱지가 있다

꽃 진자리 찾지 못하는 안대를 한 봄이 아물고 있고

화농으로 그려진 꽃의 부적을 몇 겹으로 접고 있는 화전놀이 철

 

 


 

 

김춘순 시인 /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김춘순 시인

1952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필명: 김지혜. 김춘리. 수원여대 졸업. 사회복지사.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2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2년도 천강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