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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원 시인(담양) / 팔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김정원 시인(담양) / 팔월

 

 

할아버지가 대인시장에서 수박을 고르신다

가운뎃손가락으로 수박을 툭툭 두드려 보고

"잘 익었다" 하시고

 

노점상 널조각 곁에 바짝 쪼그려 앉은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아직 멀었다" 하신다

 

 


 

 

김정원 시인(담양) / 부모

 

 

큰비 온 날, 강이 말했다

 

ㅡ흙탕물과 쓰레기와 고통을 흘려보내서 죄송해요

 

바다가 다독여 주었다

 

ㅡ괜찮아 ㆍ네 잘못이 아니야 ㆍ그리고 너는 강이지만, 나는 바다야 ㆍ

다 받아 ㆍ

 

 


 

 

김정원 시인(담양) / 영산강 따라

 

 

젊었을 때는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엄격하라

하고, 다그치며

맑고 곧은 정신으로

상류에서 급하게 달렸고

 

나이 들어서는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도 관대하라

하고, 다독이며

깊고 넓은 품으로

하류에서 느긋이 흐른다

 

 


 

 

김정원 시인(담양) / 게

 

 

앞으로 가는 것만이

앞으로 가는 것은 아니야

 

옆으로 가는 것도

앞으로 가는 거야

 

반듯한 대로만이

길은 아니야

 

길은 여러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황무지도

 

네가 가면 새 길이 되는 거야

가고 싶은 길이라면

 

옆길로 빠져도 괜찮아, 결국

그게 너에겐 앞으로 가는 거니까

 

창가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먼 산 바라보며 꿈꾸는 아이야

 

네가 꿈꾸는 하늘은 높아도 죄가 없고

네 머리에 쏟아지는 햇빛은 찬란하구나

 

-시집 ‘마음에 새긴 비문’, ‘작은숲’에서

 

 


 

 

김정원 시인(담양) / 영산강 따라

 

 

젊었을 때는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엄격하라

하고, 다그치며

맑고 곧은 정신으로

상류에서 급하게 달렸고

 

나이 들어서는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도 관대하라

하고, 다독이며

깊고 넓은 품으로

하류에서 느긋이 흐른다

 

 


 

 

김정원 시인(담양) / 농담

 

 

민들레야 부탁해

나를 너와 바꿔줘

한 순간이라도

아름다운 하얀 꽃이 되어

향기를 널리 풍기게

나 같은 시름 많은 사람이

쪼그려 앉아 골똘히 바라보게

그래서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뀌게

민들레야

장성한 사람이 되어

한 번이라도 겪어봐

아버지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

해질녘 내가

왜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는지

알게 될 거야

 

 


 

 

김정원 시인(담양) / 행복한 주인공들

 

 

할머니와 열 살 먹은 손자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할머니가 조심히 피해가려다가

주차된 고급 외제 승용차 뒷문을

유모차로 긁고 말았다

 

당황하는 할머니를 보고 손자가

차 앞 유리에 붙은 번호로 전화를 했다

 

곧장 중년 부부가 달려왔다

부인이 자기 승용차를 살펴보지도 않고

할머니에게 꾸벅 절하며 말했다

 

“할머니,죄송합니다.

좁은 골목길에 주차해 불편하게 했습니다.

이야기는 손자에게 자세히 들었습니다.

모든 잘못은 차주인 저희에게 있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머니와 손자는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외제 자동차 회사는

승용차 뒷문을 무료로 교체해 주었다

 

 


 

김정원 시인(담양)

1962년 전남 담양 출생. 전남대학교 대학원 영문과 졸업(영문학박사). 2006년 『애지』로 등단. 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 『줄탁』 『거룩한 바보』 『환대』 『국수는 내가 살게』 『마음에 새긴 비문』 『아득한 집』 등. 전 전남 담양 한빛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