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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경옥 시인 / 등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8. 30.

한경옥 시인 / 등불

 

 

야간자습 끝난 늦은 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사립문에서 깜박이던

별 하나

 

겁에 질려

땀이 흥건하도록

내달리던 발걸음을,

왈칵!

울음으로 바뀌게 하던 그

불빛

 

종종걸음치시던 어머니는

마중 대신

호롱불을 걸어놓으셨다.

 

머리 희끗한 딸이, 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는 듯

당신의 산소 앞에 환하게

불 밝혀 놓으신

원추리 꽃 한 송이

 

 


 

 

한경옥 시인 / 2월 중순

 

 

두툼한 솜이불을 걷어냈다.

밤새 뒤척일 때

떨어졌는지

잔설 같은 각질이 흩어진다.

부스러진 머리카락 몇 올도

걷어 올리며 긴 숨 토해낸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얼음처럼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새도 없이, 오슬오슬

한기가 든다.

보푸라기 같은 눈이

엉성해진 머리카락을

적시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갱년기를 앓고 있는 겨울

잔뜩 찌푸린 얼굴이

언제쯤 환해질까.

 

 


 

 

한경옥 시인 / 동행

 

 

사막은 바람 없이 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바람으로 하여 숨 쉴수 있고

바람으로 하여 움직일 수 있고

바람으로 하여 꽃 피울 수 있고......

 

나 또한 너 없으면 사막

 

네가 있어 빈 가슴 채울 수 있고

네가 있어 시린 가슴 데울 수 있고

네가 있어서 메마른 가슴 적실 수 있고......

 

새벽별인 듯

아침이슬인 듯

첫사랑인 듯......

 

 


 

 

한경옥 시인 / 부부싸움

 

 

말에도 꽃이 핀다면

사랑이라는 말에는 아마 얼음새꽃이 필 것이다.

수줍은 듯, 가녀린 듯 피어나지만

제 체온으로 쌓인 눈을 녹이면서

고개를 내미는

말에도 열매가 열린다면

용서라는 말에는 아마 모과가 열릴 것이다.

생긴 거야 볼품없지만

제 몸이 상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향기를 잃지 않는

오늘

너와 내게는

꽃도 열매도 아닌,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툇마루에서 시시덕거리는 봄 햇살 같은

 

 


 

 

한경옥 시인 / 욕심

 

 

서두르지 마라

 

일찍 핀 꽃은

다른 꽃이 피기도 전에 진다.

불꽃은 활활 타오를수록

더 빨리 사그라진다.

올라간 만큼

박살나는 능금을 보라.

가을 들판에 고만고만하게

키를 맞춘 벼들은

태풍 앞에서도 의연하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마라.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에서

 

 


 

 

한경옥 시인 / 달밤

 

 

실수였다.

길 위의 작은 물웅덩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달을

밟은 것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내달리다 마주친

순간

 

찰박!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누가 보았을까

두리번거리는 사이

다른 웅덩이로 옮겨 앉아

시침 뚝!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에서

 

 


 

한경옥 시인

1956년 충남 공주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졸업. 2013년 시 전문 월간지 《유심》을 통해 등단.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 한국 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