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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옥 시인 / 등불
야간자습 끝난 늦은 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사립문에서 깜박이던 별 하나
겁에 질려 땀이 흥건하도록 내달리던 발걸음을, 왈칵! 울음으로 바뀌게 하던 그 불빛
늘 종종걸음치시던 어머니는 마중 대신 호롱불을 걸어놓으셨다.
머리 희끗한 딸이, 아직도 마음 놓이지 않는 듯 당신의 산소 앞에 환하게 불 밝혀 놓으신 원추리 꽃 한 송이
한경옥 시인 / 2월 중순
두툼한 솜이불을 걷어냈다. 밤새 뒤척일 때 떨어졌는지 잔설 같은 각질이 흩어진다. 부스러진 머리카락 몇 올도 걷어 올리며 긴 숨 토해낸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얼음처럼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새도 없이, 오슬오슬 한기가 든다. 보푸라기 같은 눈이 엉성해진 머리카락을 적시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갱년기를 앓고 있는 겨울 잔뜩 찌푸린 얼굴이 언제쯤 환해질까.
한경옥 시인 / 동행
사막은 바람 없이 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바람으로 하여 숨 쉴수 있고 바람으로 하여 움직일 수 있고 바람으로 하여 꽃 피울 수 있고......
나 또한 너 없으면 사막
네가 있어 빈 가슴 채울 수 있고 네가 있어 시린 가슴 데울 수 있고 네가 있어서 메마른 가슴 적실 수 있고......
새벽별인 듯 아침이슬인 듯 첫사랑인 듯......
한경옥 시인 / 부부싸움
말에도 꽃이 핀다면 사랑이라는 말에는 아마 얼음새꽃이 필 것이다. 수줍은 듯, 가녀린 듯 피어나지만 제 체온으로 쌓인 눈을 녹이면서 고개를 내미는 말에도 열매가 열린다면 용서라는 말에는 아마 모과가 열릴 것이다. 생긴 거야 볼품없지만 제 몸이 상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향기를 잃지 않는 오늘 너와 내게는 꽃도 열매도 아닌,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툇마루에서 시시덕거리는 봄 햇살 같은
한경옥 시인 / 욕심
서두르지 마라
일찍 핀 꽃은 다른 꽃이 피기도 전에 진다. 불꽃은 활활 타오를수록 더 빨리 사그라진다. 올라간 만큼 박살나는 능금을 보라. 가을 들판에 고만고만하게 키를 맞춘 벼들은 태풍 앞에서도 의연하다.
너무 앞서 나가지 마라.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에서
한경옥 시인 / 달밤
실수였다. 길 위의 작은 물웅덩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달을 밟은 것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내달리다 마주친 순간
찰박!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누가 보았을까 두리번거리는 사이 다른 웅덩이로 옮겨 앉아 시침 뚝!
-시집 『말에도 꽃이 핀다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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