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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희 시인 / 손
밥을 먹다 말고 아이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린다 체르니 30번, 손가락은 건반을 두드리듯 식탁 표면을 달리기 시작한다
밥그릇과 수저를 지나 벽을 타고 넘어 저수지를 건너뛰고 숲을 지난다 통통 튀는 손가락 사이로 골짜기가 생기고 모래가 흘러내린다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가는 내 손에 해초가 엉킨다 아이는 소와 양, 동굴, 빙하기를 넘어간다 나는 자꾸만 도망가는 아이의 손목을 제자리에 갖다놓으려 애쓴다
우우 일어서는 바람과 풀, 종소리 두드리고, 건드리고, 타 넘고 빈 손인 채로 넘어가는 고개들 아이는 몸을 갖기 이전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내 손은 오랜 과거의 한 지점에서 아이의 손을 움켜쥔다 돌아오는 길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확인하며 달려오는 그 어디쯤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식탁 위 얼룩진 흔적들을 행주로 닦아낸다
박설희 시인 / 잔치 갔다 오는 세 노인
지하철 노약자석에 나란히 앉아서 노인 셋이 졸고 있다 숨결과 옷에서 음식 섞인 술 냄새 피어오른다 잔치를 소화해 내기조차 버거운 그들 커다란 먹이를 삼킨 뱀처럼 깊은 잠을 자는 중이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삼켜왔다 혀에 감기면서도 맵고 짜고 질긴 시간들 몇 번의 잔치를 거친 끝에 어깨는 늘어지고 머리카락은 세었다
힘을 잃은 팔들이 서로 기대어 있다 역을 지나칠 때마다 잠깐씩 환해지는 바깥 이미 끝난 잔치가 아쉽고 허전한지 입맛을 다신다, 잠꼬대를 한다 유쾌한 입 주변의 주름들
덜컹거리며 지하철이 다음 잔치를 향해 달려간다
박설희 시인 / 유등流燈
날마다 별은 무겁게 돌아눕고 사방에서 웅성거림 들려온다 환한 대낮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 강물에 등을 띄운다 타오르는 수백 개의 눈
자꾸 기슭으로 달라붙는 눈을 강심으로 밀어 넣는다 눈들이 강바닥을 비추려 제 속의 빛을 끌어 모은다 가물거리는 심지를 북돋우면 눈에서 풍경이 쏟아져 나온다 온갖 수수께끼와 질문들이 뒤섞이면서 물결 위에 이는 파문
파문을 끌고 간다 지느러미 돋아난다 아가미 벌어진다 어둠을 등에 태운다 물살에 파묻히며 지워질 듯
강이 하나씩 눈을 감기 시작한다 물 속에 제 빛을 들여보내고 고요히 한 생을 살러 간다
박설희 시인 / 할머니의 주머니
아버지의 노름빚을 받으러 사내가 찾아 왔을 때 할머니는 조그만 칼을 넓고 깊은 몸뻬바지의 주머니에서 꺼냈다 집을 넘겨줄 수는 없다고 차라리 당신을 죽이라고 했다 파르라니 빛을 발하는 칼날을 목에 들이댔다
할머니는 스웨터, 몸뻬바지, 속곳에 겹겹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 모자와 버선 속에도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내가 보챌 때마다 그 속에서 사탕이나 동전이 나왔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그 속에 숨어 있던지......물고기뼈 같은 빗이나 실뱀 같은 노끈, 구슬과 비단 손수건 따위, 가끔씩은 어디에 넣 어두었는지 잊어버려 할머니는 끝도 없이 몸을 더듬없다 지레짐작으로 잘못 꺼낸 열쇠 하나로 한동안 어머니와 말을 않고 지냈다. 할머니는 몸속에도 주머니를 만들어둔 듯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속내는 끈으로 꽁꽁 졸라매 소리가 새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무 엇을 숨겨 두었는지 그 주머니들이 묵지근해진 날이면 눈꺼풀 속 눈동자를 굴리며 잠꼬대를 심하게 하곤 했다
아주 오래된 꿈속에서 아버지를 꺼내면서 할머니는 신귤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선지 할머니의 몸속에 낭종이 되고 곪기도 했 던 아버지, 몸을 뒤채일 때마다 물컹거리며 툭툭 터져 할머니의 잠자리는 늘 흥건했다
박설희 시인 / 저수지
‘괴다’라는 말은 ‘사랑하다’라는 뜻
거울처럼 비추다가 같이 출렁거리기도 하는
내 속에 네가 온통 괴어 너를 내뿜는 것 너를 일렁이는 것
속속들이 썩더라도 끝내 품는 것
석양빛이 환히 불타오르듯 어두워질지라도
-『세계일보/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2022.08.29
박설희 시인 / 가슴을 재다
브래지어 사러 왔는데 치수를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눈대중으로 얼추 비슷한 치수의 것을 들고 성큼 일어선다
양팔을 들게 하고 브래지어로 내 가슴 치수를 잰다 나도 모르는 내 가슴의 치수를 잰다 줄었다 늘었다 어떨 땐 콩알만 했다 어떨 땐 듣도 보도 못한 공간으로 휙 날아가 버리는 내 가슴을 잰다 내 가슴 크기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며 사양해보지만 막무가내, 평생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느라 살가죽에 가까워진 젖가슴으로 당당히 서서 내 가슴 크기를 잰다 당신 가슴은 얼마라고 숫자를 댄다
황송히 그 숫자를 받아들고 아, 내 가슴이 이만하구나 그런데 큰 건지 작은 건지 기준치를 몰라 쩔쩔매다가 생각해보니 가슴 크기의 평균이 뭐가 중요하랴
내게 딱 맞는다며 자신 있게 내미는 브래지어를 웃음으로 받아 들고 돌아서려는데 주변 노점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원 남문시장의 가슴들이 다들 깔깔 웃는다 빈 가슴으로 웃는다 비워서 충만해져서 웃는다
박설희 시인 / 전문가
유리창에 엉겨 웅성거리는 물방울 물집처럼 버스정류장에 고여 있는 여자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난 듯 자신의 생을 잠시 출렁거려본다 소매 밖으로 비어져 나온 풀기 잃은 실밥들 한 오라기 잡아당기면 줄줄이 풀려나올 것 같은
그녀, 떠나보내는 전문가 이제 자신만 남았다 숱한 문들이 열리고 닫히지만 그새 몸이 바닥의 일부가 되었는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어디에나 있으므로 어디에도 없는 길 쿨렁이는 고름을 쏟아내려고 가끔씩 어깨를 들먹인다
버스가 떠날 때마다 습관처럼 움찔 몸을 떤다 자신을 비켜간 것들의 행방을 곰곰 뒤적여본다 급정거를할수록 출발도 급한 그들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갔을까 몸이 온통 자국투성이인 여자 덜컹거리며 차가 지나갈 때마다 파인 홈이 점점 깊어진다
박설희 시인 / 야생화 출사(出寫)
북사면의 계곡을 따라 비탈을 오른다 돌 틈, 나무 밑동, 낙엽 아래, 안력을 돋우며 봄이 생산해낸 노다지를 찾는다 모데기마을에서 처음 발견된 희고 부드러운 다섯 개의 꽃잎을
땅바닥에 몸을 밀착시킨다 흔들리는 것이 자신인지 꽃인지 수면 아래 물고기를 어둠 속에서 낚아채듯이 호흡을 멈춘다, 셔터를 누른다 속눈썹 길이만 한 꽃술을, 꽃술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사물의 그림자를 보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
한 송이 야생화와 거기에 어린 빛을 잡아내겠다고 자그마한 것들에 온몸을 내던지기까지 지층을 뚫고 올라온 여린 줄기 한 잎의 우주를 불러세운다
나비보다 먼저, 나비같은 날개를 달고 팔랑거리며 금세 날아오를 것 같은 것들을 수증기 움켜쥐고 천상의 나팔을 부는 것들을
꽃에 무릅을 꿇는다 눈이 얼었다 녹은 물이 이끼를 키우고 그 이끼에 뿌리를 내린 모데미꽃 찬바람에 맞서 꽃을 피운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태백바람꽃, 들바람꽃 도르르 말린 채 드릴처럼 상수리 낙엽을 뚫은 얼레지 잎 저 잎은 제 부피를 키워 낙엽을 쪼갤 것이다
고양이처럼 포복하고 자벌레처럼 몸을 접었다 펴는 사이 까악거리며 까마귀가 순찰을 돌고 꽃술 그림자까지 나비 그림자까지 한 번의 이미지를 훔치는 것 외에 어떤 욕심도 없으므로 순결하다 믿으며
일생의 노역에서 벗어난 머리 희끗한 야생화들이 흙투성이 발로 비탈을 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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