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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산 시인 / 무척
선생들은 무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셀 수 없고 잴 수 없다고 그래서 운산할 수 없다고 형체가 없어 그릴 수 없다고 모두 지우라고 시켰다
그래도 무척을 보았다 몽골 초원에서 그곳 말 타는 아이들 손짓에서 그 위를 나는 독수리 날갯짓에서 무척이 서 있었다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먼지 속에서 새벽녘 젖은 풀잎 끝에서 내 이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에서 그 젖은 눈 속에서 무척이 있음을 듣고 보았다 어깨를 쓰다듬던 바람 한 점 울렁이던 미세한 떨림과 울림 이 모두가 자라 무척이 되었다
숫자로도, 선으로도 담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척을 꺼내 든다 때로 말없이 때로 분명하게 시공을 건너는 그 눈금을 생각한다 무척
-계간 『시인시대』 2025년 여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전지적 시인 시점
페북(facebook)을 한다 라고 말하고 본다 보기는 쓰기로 보인다
엘 시인은 또 아름답지 않은 술상 앞에 있다 그리고 미학에 대해 쓴다 그의 영광은 항상 이런 데서 보인다 제이 시인은 오늘도 분주하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빼곡하다 그의 DB의 순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기쁨과 덕망을 떠올리는 알 시인은 언제나처럼 늠름을 가장하지만 그래서일까 그의 내밀을 농담으로라도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알 시인은 오늘도 천개의 손을 나뭇잎처럼 매달고 있다 가려진 그의 뿌리는 알 수 없다 진지한 에이치 시인은 생태적으로 규율을 거부하나 생래적 관성은 남아 있다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쓰기로 하기가 된다고 라고 말하는 곳에서 뜨거운 기계는 디바이스가 된다 또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황정산 시인 / 거푸집의 국적
길가 공터에 거푸집이 포개져 있다 시멘트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고 잠시 누워 쉬고 있다 거친 질감이 상그러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흑단과 마호가니도 아니고 삼나무나 편백이 아니라 해도 그들도 이름은 있었을 것이다 와꾸나 데모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응우옌이나 무함마드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상표도 장식도 아닌 국적을 구태여 말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타이가의 차가운 하늘을 찌르거나 우림의 정글에 뿌리내려 아름드리가 되길 꿈꾸었으리라 오늘도 도시를 떠받치던 불상의 목재 하나가 비계 사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제 국적과 이름이 밝혀질 것이다
황정산 시인 / 와리바시의 알리바이
너는 있었다 이름을 빼앗고 얼룩진 흰옷을 입혀도 너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고 주변을 둘러보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너는 없었다 풀밭 위 점심 식사에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네 거친 살결의 뽀얀 표백제를 걱정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너를 애써 모른척했다 그렇게 너는 없었다 네가 없는 곳에서 그녀들은 그곳으로 쇠젓가락을 부러뜨려야 했고 그들은 열쇠 구멍을 시멘트로 막아야 했으며 아이들은 고무줄총을 만들기 위해 쇠톱을 주문하고 벌레들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있었다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러운 소문이 되는 너의 있음을 너의 이름을 다시 불러 증명한다
-시집 『거푸집의 국적』(상상인, 2024) 수록
황정산 시인 / 대상포진
피도 눈물도 아닌 수포가 돋는다 벗기다 만 비늘처럼 띠로 돋는다 허무를 베끼고 허망을 첨부하여 써먹은 말들이 모두 물거품은 아니라는 듯 시옷자가 되어 거꾸로 떨어져 박힌다 림프관을 떠돌다 힘줄에 철근처럼 박히다 살갗을 뚫고 터져 나오는 그 모두가 다 수포라니 없다고 할 수 있었던 것들이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이 수포로 사라지지 않고 돋는다 아프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늦은 가을
여인들은 서둘러 옷을 입고 어디론가 흩어져 간다 말간 하늘에 더 높은 머리칼을 이고 어머니 들어오신다 나의 젖은 다리 너무 쉽게 말라버린다 길고 먼 여행을 준비한다 그런 어느 날 마트를 찾는다 거기에서 옛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빨간 양파망과 노란 계란판 사이 어느 언저리에 서 있다 그녀의 바구니 안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나와 함께 했을 수 있는 그녀의 황량한 삶이 그 안에 있다 마트 밖에서는 주황색 라면 봉지가 날아다니고 있다 낡은 가구와 책들을 버리다 어디선가 온 소용없는 편지들을 발견한다 고장 난 프린터나 스피커 그리고 이제는 신거나 멜 수 없는 오래된 구두와 가방을 찾아내 함께 버린다 그런 가을이 다 가는 어느 차가운 날 새벽 어머니는 내가 쌓아둔 물건들을 치우다 한쪽이 마비되어 그만 쓰러지신다 나는 떠나지 못 한다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바지랑대의 하루 젖은 것들을 붙잡고도 슬프지 않았다 외줄 위에는 이슬도 쉬이 말랐다 죽은 아이의 머리칼을 물고 물길을 헤집어도 노엽지 않았다 물속에 길은 없었다 날개 가진 것들이 찾아오지만 잠시였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았다 붉은 노을은 더 짧게 지나갔다' 이제 하늘을 잴 시간이야 내가 쓰러지면 모두가 힘들어 말씀하시고 어머니는 누우셨다 누워서도 길었다 -계간 『시와사상』 2024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시가 짧아야 할 7가지 이유 짧은 시가 사라지고 있다 짧은 시를 쓰던 시인들이 빨리 죽거나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거나 모두 선생이 되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와인의 라벨을 읽을 수 있지만 옛 노래 제목은 생각나지 않아서 고비와 실크로드를 돌아 천 개의 고원을 넘고 인도에 가 촛불을 들여다봐도 핫산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어서 아니 그것을 말하지 않기 위해서 시는 길어지고 말은 짧아지고 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시는 짧아야 한다 -계간 『맥』 2024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입다
벗긴 내가 걸려 있다 시간이 빠져나가 납작하게 벗겨진 내가 벗은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잠든 사이 가만히 들어와 무거운 머리를 수그리고 시린 발목을 감춘 채 매달려 있는 입은 나이기도 하다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도 가랑이에 묻은 진흙도 그대로다 벗은 나를 내려다보다 잠시 부스럭거려 입을 내일의 나를 걱정한다 벗은 나로 남는 것이 두려워서다 벗은 나를 본 사람은 입은 사람이 아니므로 벗은 나가 입은 나임을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 한다 벗은 나는 벗는 나였다는 소문 속의 나일 뿐이고, 입은 나로만 기억되거나 입는 나로만 증명되는 나는 입히는 나이기도 하다 나는 입다 입다는 자동사다
-계간 『다층』 2024년 여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와리바시의 알리바이
너는 있었다 이름을 빼앗고 얼룩진 흰옷을 입혀도 너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고 주변을 둘러보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너는 없었다 풀밭 위 점심 식사에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네 거친 살결의 뽀얀 표백제를 걱정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너를 애써 모른척했다
그렇게 너는 없었다 네가 없는 곳에서 그녀들은 그곳으로 쇠젓가락을 부러뜨려야 했고 그들은 열쇠 구멍을 시멘트로 막아야 했으며 아이들은 고무줄총을 만들기 위해 쇠톱을 주문하고 벌레들은 나뭇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있었다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 부끄러운 소문이 되는 너의 있음을 너의 이름을 다시 불러 증명한다
-계간 『다층』 2024년 여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어처구니의 행방
눈썰미 좋은 이가 알아보았다 깎고 다듬어 자리를 정해주었다 무거운 어깨가 힘들지 않았다 쳇바퀴를 돌리면서 세상을 돌린다 생각했다 많은 사람의 손을 잡았다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여기저기 팔려 다녔다 고된 노동으로 몸피가 줄자 붕대를 감았다 찾는 곳이 많아졌다 장독대에서 노숙을 하다 알게 되었다 동료들이 모두 사라지고 혼자였다 처음으로 본 별빛이, 유난히 밝다고 느끼던 날 앓던 이처럼 어처구니는 빠져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졌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어 돌다리를 딛고 다닌다 어처구니없는 곳에 풀씨가 날아들고 가끔 꽃이 피기도 한다 다 어처구니없이 생긴 일이다
* 어처구니가 맷돌 손잡이를 말한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민간어원설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이런 오류가 어처구니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도 한다. -계간 『다층』 2024년 여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텅 빈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을 끌어내리는 그 무엇들 왼쪽 아니면 오른쪽 또는 저 아래 내 눈에 걸려드는 비문 같은 것 켜켜이 쌓이거나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삶의 부스러기들 때론 아름답게 영글어 가다만 시든 귀한 것들 그래서 오늘 애써 텅 빈 거짓말을 한다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지 못하리“
황정산 시인 / 장마 떠났던 것들 젖은 채 돌아온다 가벼운 것들 없어진 무게를 지고 한 발을 들고 서 있다 모여 있는 것들 다시 흘러간다
황정산 시인 / 먹는 생각
팥칼국수 먹고 싶다 팥물이 내 온몸 먹어들어 다시 끓어오를 거야 언젠가 만난 한 여자 페미니스트 그 여자 내가 아무리 먹어도 자긴 먹힐 수 없다는 그 여자 그래서 우리 그냥 남자고 여자였는지 몰라 서로 먹어들어 젖은 아랫도리 오래오래 마르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그녀의 친구 베지테리언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먹으려 하지 않아 난 그러지 말고 그냥 서로 먹어들자고 먹고 살자는데 관념이 무슨 소용이냐고 아주 무식하게 말을 건넸는데 그 말 알아먹었는지 몰라 아마 내 말 너무 비려 먹지 못했을 거야 길을 가다 만난 마른 꽃 같은 한 여자 그녀가 물려준 건포도 두 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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